2016년 9월 25일 일요일

삼국시대 초기 강역 고찰


 

변한 왜인과 임나 왜국 

 

변한은 BC 3 – 4 세기 경의 청동기시대부터 경북 김천의 감문국 이하 경상도에서 성립되기 시작한 소국 연맹체이다. 청동기 시대의 변한 왜인 유적으로는 경상도 울산 검단리와 창원 덕천리 등이 있다. 변한 왜인은 청동기/철기 과도기를 거치면서 소규모 연맹 국가의 틀을 갖추어나갔다.

 

경북 김천 이북의 경상도는 진나라 노예들에 의해 성립된 진한 12국이다. 진한 12국 역시 BC 3세기경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철기를 가지고 들어온 이주민이다. 사료에 따르면 진한과 변한왜는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고, 한반도 중서부(경기, 충청, 전라)의 마한에게 종속되어 조공을 바치던 촌락 국가 연맹들이다.  

 

변한 왜와 진나라 노예의 진한이 성립된 후 약 200년이 지난 BC 1세기경에 신라인들이 진한에 속한 경북 경주 지역(서라벌)을 차지하고 신라(사로국)를 건설한다. 그리고 BC 1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100년에 걸쳐 변한 왜 지역에는 가야인이 들어와서 가야 연맹을 건국한다. 신라와 가야는 우츠 강철이라는 선진 기술을 가진 강력한 해양 이주민 집단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BC 57년 박혁거세 집단과 사로 6촌 집단이 서라벌에 처음 들어온 후, 이들이 처음 만난 외부 집단은 백제도 아니고, 고구려도 아니고, 말갈도 아니고, 바로 왜 또는 왜인이다. 신라가 6세기까지 가장 많이 접촉하고 가장 많이 싸운 외부 집단 역시 백제도 아니고 고구려도 아니고 말갈도 아니고, 바로 왜, 왜인, 왜국, 왜병이다. 신라의 초기 600년 역사는 ’ ‘왜인’ ‘왜병’ ‘왜국과의 치열한 전쟁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변한인들을 또는 왜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에 성립한 국가인 임나(부산가야)에 대해서도 임나로 기록하지 않고, ‘왜국’, ‘왜병’, ‘왜인이라고 기록한다.

 

임나의 원래 이름은 의부가라이고, 의부가라의 가 오늘날 부산 지명의 유래이다. 초기 임나는 부산 울산 지역을 점유하며 태화강을 경계로 신라와 국경을 맞대었다.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2,000년 전에 울산의 태화강은 강이 아니라 바다였으므로 정확한 기록이다. 또한 김해와 양산 지역 역시 모두 바다였다. 임나왜국은 바다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일종의 섬이어서, 육로보다는 해로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편리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임나 왜인들은 매우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을 가지고 있었다. 

 

BC 3세기경부터 성립된 변한 왜는 일본의 구주 지역으로 진출한 최초의 도래인으로 여겨진다. 변한 왜인들은 일본 열도에서 여러 소국들을 세우는데, 그 이름이 야마토이다. 야마토는 왜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변한 왜인의 정체가 정확히 드러난다. 변한인은 한인이 아니라 왜인인 것이고, 변한인들 스스로도 자신을 왜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만약 변한인이 자신을 한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일본에 진출하여 점유한 땅을 한인토정도로 지어야 맞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본기에서도 변한인이 스스로를 부르던 명칭인 또는 왜인으로 변한인을 기록한 것이다. 변한 왜인이 일본 열도에 들어가기 전에는 일본에는 왜인이라는 존재가 없었고, 일본은 라고 불리지도 않았다. 변한 왜인이 일본에 들어가면서부터 일본이 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변한 왜인 이전에 일본에는 조몽인이라는 소수의 수렵채취인이 있었다. 참고로, 경상도 지역에는 5,000년 전부터 조몽인이 거주하였다. 이는 경상도 지역에서 출토되는 조몽토기 유물로 증명된다.

 

한강 이남의 소국들을 부르는 명칭인 이른바 ’ ‘삼한’ ‘마한’ ‘진한등은 사실 한반도 중남부 사람들 사이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름이 아니다. ‘이라는 명칭은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점유하던 중국의 낙랑군이 한강 이남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낙랑에서 한강 이남을 왜 또는 한지라고 불렀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따라서 타 집단이 부르던 이라는 이름은 변한 왜인들에게는 생소했을 것이고, 그 당시 원시 촌락 국가들에서 변한이라는 국명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고, 국가 개념 대신 종족 개념이 더 우세했을 것이다. 그리고 변한인이 자신을 지칭하던 명칭 또한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또는 왜인이다. 신라인들은 변한인이 스스로를 왜 또는 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이를 따라서 변한인을 왜인이라고 부른 것이고 신라본기에 이들을 또는 왜인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른바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의 이름이 기장족희인데 이는 부산(기장) 여자라는 의미이다. 경북 김천 이하의 경상도는 변한 왜인의 땅이므로 기장족희는 당연히 변한 독로국(부산) 왜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변한이나 임나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대신 변한과 임나를 왜, 왜인, 왜병, 왜국이라는 말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 열전 강수전의 강수는 원래 임나가랑 사람이다는 구절에서 임나라는 말이 한번 나오기는 한다.  

 

그리고 진경대사비문은 임나왜국(부산가야)의 실체를 정확히 말해준다. 일부를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진경 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요, 풀에서 성스러운 가지를 뽑았다. 이웃나라의 침략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 김유신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타고, 바다(鰈水)의 정기에 올라서, …………. 능히 세 조정을 받들어 멀리 진한(辰韓)의 풍속을 어루만졌다.

 

진경 대사는 임나왜국의 왕족이고 먼 조상이 김유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가라(김해) 사람이 아니라 임나 왜국(부산) 사람이다. ‘강수는 원래 임나가랑 사람이다는 말은 강수는 원래 부산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부산의 임나왜국이 강성해져서 임나 왜국이 변한 지역의 맹주로 떠오르며 임나 왜국 연맹(임나 10)이 성립된다. 이 임나 연맹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경상북도 김천 이하의 임나 왜인을 다른 왜인인 일본이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가라(김해)와 임나왜국(부산가야)은 서로 다르다. 가라는 임나가 강성해지면서 임나에 종속되는 나라이다. 그래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가야 기록에는 무려 270년의 공백이 있다. 그러나 임나 왜국은 왜국’ ‘왜인’ ‘왜병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계속하여 나타난다. 그러다가 5세기 말부터 다시 가라(김해)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의 임나 연맹은 5세기 초부터 서서히 약화되어 붕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에는 부산 지역으로 축소되어 562년에 신라에게 멸망한다.



정리
  1. 변한은 BC 3-4세기 청동기/철기 시대에 걸쳐 경북 김천 감문국 이하의 경상도 지방에서 성립된 왜인 연맹체이다.
  2. 진경대사비문에 따르면 김유신은 임나의 왕족이다.
  3. 임나(부산가야)는 태화강을 따라 신라와 접경하였고, 태화강은 2,000년 전에는 바다였으므로, 임나의 북쪽이 바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4. 변한 왜인들이 일본에 진출하여 세운 소국들의 이름은 야마토인데, 야마토란 왜인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5. 임나왜국이 강성해져서 임나연맹이 성립되고, 이 임나연맹을 또 다른 왜인인 일본이 지배하였다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요체이다.




 

2016년 9월 23일 금요일

고려도경에 나온 김부식의 인물묘사


삼국사기 편저자인 김부식은 흑인이다

 
김부식은 고려 인종 때의 인물로서 삼국사기의 편저자이고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1075년에 태어나 1151년에 사망하였고, 본관은 경상도 경주이고 고향도 경상도 경주이다. 

김부식이 활동하던 시기는 고려 중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송나라 사신 자격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
徐兢)은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을 남겼다.

고려도경 인물편에서는 여러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김부식에 대한 묘사는 아래와 같다:


부식(富軾)은 얼굴이 통통하고 체구가 컸으며,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박학(博學)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었고, 고금(古今)의 일을 알고 있었으니, 그 학사(學士)들이 믿고 따르는 자로써 그를 능히 앞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도경』 권8 인물 김부식

김부식에 대한 묘사는 인종, 윤언이, 이자겸 등 다른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는 매우 차이가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풍채가 화려하다, 단정하다, 체구가 작다’와 같이 외모를 개략적으로 표현했지만, 유독 김부식에 대해서만은 피부가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고 자세히 서술했다. 이는 김부식이 다른 한국인과는 확연히 눈에 띄게 구별되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인종인 한국인들 사이에 흑인이 끼어 있다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서긍은 이러한 매우 구별되고 특이한 김부식의 인상을 고려도경에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김부식은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라는 문구는 당연히 흑인을 묘사한 것이다. 백인은 얼굴이 하얗고 눈이 쑥 들어가 있고, 황인은 얼굴이 노랗고 눈이 평평하다. 경상도 지역은 고려 중기에도 여전히 흑인 상태였던 것이다. 소수 유전자가 다수 유전자에 흡수되는 기간은 약 400 ~ 500년 정도이다. 지금 미국에 있는 소수 유전자인 아프리카 흑인들(African-American)은 앞으로 200년 정도면 완전히 백인 혼혈로 변해서 흑인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김부식이 아프리카 흑인 계통의 페르시아인(African-Persian)이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김부식은 드라비다 계열의 타밀족 흑인, 즉 아시아 고유 흑인이다. 아프리카 코끼리가 있고, 아시아 코끼리가 있듯이, 아프리카 흑인이 있고, 아시아 흑인이 따로 있다. 동양에서는 이 흑인을 흑소 종족이라고 부르고 서양의 학자들은 이들을 드라비다족이라고 부른다.  

드라비다 타밀 흑인은 약 2000년 전에 인도 남부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를 거쳐 경상도에 들어와 신라와 가야를 건국하였다. 이 때부터 시작된 드라비다 타밀 흑인의 경상도 이주는 100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드라비다 타밀 흑인은 우츠 강철이라는 선진 기술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러한 선진 기술을 바탕으로 진한의 일부인 경주를 차지하여 신라를 건국하고, 경북 김천 이남의 변한() 지역에 가야를 건국한다.  

바닷길을 통한 종족 이동은 사실 수천 년 전부터 행해지던 일이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조몽 토기는 조몽인의 이주를 의미하고, 고상가옥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폴리네시아인의 것이다. 조몽 토기는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미 신석기 시대에도 바닷길을 통한 종족 이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상 가옥은 열대 지방 특유의 가옥 양식으로 경상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도착한 타밀 흑인종 집단은 박혁거세 집단과 사로 6촌 세력, 호공 세력이고, 이들은 BC 57년에 경상도 경주(서라벌)에 사로국(신라)을 건국한다. 이후 구간 세력, 석탈해 세력, 김수로/이진아시 세력, 허황옥 세력 등이 경상도에 들어와 가야를 건국한다. 김수로와 이진아시는 형제간이고, 이들의 타밀 흑인종 이름은 뇌질주일, 뇌질청예이다(석리정전).

자장 법사(590 ~ 658)는 신라의 진골 귀족 출신이고, 이름은 김선종이다. 자장이 632년 선덕여왕의 왕명을 받아 당나라의 청량산에 갔을 때, 문수보살로부터 전해들은 말은 다음과 같다:


‘너희 나라(신라) 국왕은 인도의 찰리 종족인데, 이미 불기를 받은 까닭에 남다른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족과는 같지가 않다.   
  

위의 찰리종족은 인도의 드라비다 타밀 종족을 말한다. 한반도의 주요 종족인 동이족과는 당연히 인종부터 다르다고려도경에서 김부식의 피부가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고 나오므로 고려 시대에도 경상도는 아직 황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흑인 상태였고 고려 후기를 거쳐 비로소 황인의 외모를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상도 특유의 흑인 유전자는 현재에도 경상인 안에 잠복해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