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0일 월요일

신라와 가야의 기원 연구 - 업데이트


한국의 흑인 성씨 II - 흑인신라와 흑인가야


신라와 가야, 즉 경상인의 초기 인구 구성은 한국인이라고 할만한 종족 집단이 하나도 없고, 전부 이민족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BC 3 -2
세기 경 만리장성을 쌓던 노역에 동원된 진나라 노예들이 정국의 혼란을 틈타 도망쳐오자 마한이 이들을 동쪽 경계의 땅(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중국의 진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 하였다. 중국인이 잡아다 노예로 쓴 중국 국경 부근의 잡다한 떠돌이 오랑캐 유목민들, 전쟁 포로, 중국인 죄수 등이 바로 사료에 나오는 "진나라 노예들"로 추정된다. 한국인은 이들을 멸시하여 '찐따새끼'라고 했는데, 진나라 새끼, 진한 새끼라는 의미이다.

진나라 노예의 언어는 마한과 달랐다. 현대 경상 방언은 한국어와 달리 독특한 성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진나라 노예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진나라 언어, 즉 중국어였기 때문이다. 중국어는 성조를 가진 언어이고, 진나라 노예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중국어였으므로 2,000년이 지났음에도 현대 경상 방언에 중국어 성조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철기를 가지고 들어온 진나라 노예가 점유한 진한은 경상북도 김천(감문국) 이북 지역이고, 이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유래한 성씨는 진나라 노예의 성씨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천 이남의 변한왜구들은 진나라 노예들과 잡거한다. 그래서 이들의 언어와 풍속이 비슷해진다.  

일반인들은 신라와 가야, 진한과 변한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종족 집단이다. 진한은 BC 3-2세기에 걸쳐 중국의 혼란을 틈타 한반도로 도망 온 진나라 노예들로 이루어진 소국 연맹체이고, 변한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경북 김천 감문국 이남에 왜인들이 세운 소국 연맹체(변한12)이다.

그 후 BC 1세기에 드라비다 타밀 흑인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이 들어와서 진한 내의 경주 지역을 점유하고 신라(사로국)를 세운다. AD 1세기에는 구간세력, 김수로, 이진아시, 허황옥 등 또 다른 드라비다 흑인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이 경남 지역에 가야 소국 연맹을 건설한다.  

경상도 지역은 BC 3세기부터 진나라 노예가 세운 진한과 왜인이 세운 변한의 24개 소국 연맹체로 시작했다. 이후 BC 1세기에서 AD 1세기에 걸쳐 새로운 이주민인 드라비다 타밀 흑인으로 추정되는 집단들이 신라국(사로국)을 진한의 경주 지역에, 가야 6국을 변한 지역(경북 김천 이하)에 건국한다. 신라, 가야가 건국된 후에도 진한과 변한은 6세기까지 존속하였다(양직공도 신라제기 참조).

다시 AD 3세기에 철기를 가진 흉노 식인종 집단이 신라로 내려와서 신라의 지배계급을 형성한다. 미추 이사금을 시조로 하는 흉노 김씨 신라의 시작이다.
흉노신라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 왕조이다.
김일제가 마구간 노예라는 사실이 고대 역사 자료들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고, 특히 신라 측 기록에서는 김일제 노예가 '성한왕'으로 나온다. 중국 감숙성 난주공원에는 말의 고삐를 쥐고 있는 마구간 노예 김일제의 동상이 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노예를 시조로 하는 국가는 신라를 제외하고는 세계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다.  

하플로 그룹 C에 해당하는 흉노는 오줌을 받아 세수를 하고, 짐승의 창자(곱창, 막창)를 날 것으로 먹고, 새와 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교미를 하고, 인육을 먹는 식인종이다. 새와 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교미란 어미가 아들하고, 아비가 딸하고 교미를 한다는 의미이다. 흉노 식인종은 특히 여자들을 많이 잡아먹었다고 한다. 식인종이니까 여자를 통구이(바베큐)를 해서 먹었을 거라는 상식과는 달리 주로 여자를 토막 내어 큰 솥에 삶은 후 먹었다고 한다. 북방 계통의 흉노, , 모용, 선비, 정령, 탁발 이런 부족들이 식인종 부족이다. 식인종은 아프리카, 남미 오지에만 있는 게 아니고 경상도에도 있다.

흉노는 원래 시베리아에서 거주하던 종족이고, 시베리아에서 남하하면서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다른 하플로 그룹인 R과 섞이게 된다. R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하플로 그룹 중 하나이다. 이는 스페인 등 이베리아 반도의 주류 하플로 그룹이고, 스페인은 기본적으로 약탈과 식인을 일삼는 해적들이고, 세계의 온갖 병폐를 낳은 미개하고 더러운 국가이다. 현대의 남미 국가들은 이 스페인 계열을 조상으로 한다.

흉노 식인종이 하플로 그룹 R과 교잡해서 만들어진 종족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갈족이라는 흉노 교잡종족은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식인종이다. 중국이 흉노나 흉노 교잡종(bastards)을 끝까지 추격해서 멸종시킨 이유는 근친 교미를 하는 식인종인 이들은 정주 생활이 불가능한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다. 흉노는 멸종했지만, 현대에도 그 교잡종의 하나인 야쿠트 종족이 시베리아 쪽으로 도망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플로 그룹 C는 하플로 그룹 D와 함께 가장 열등하고 미개한 하플로 그룹이다. 미개하고 열등한 하플로 그룹 C는 자연스럽게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나 대개 시베리아의 혹한 지역에서 소수 종족으로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시베리아 지역은 겨울이면 보통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 하플로 그룹 D는 티벳, 일본 등지에 있는데, 이들 지역 역시 험악하고 고립된 산악지역과 섬 지역이다.

우월한 유전자는 선진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생산력이 높은 평야지대에 자리를 잡는 반면, 열등한 유전자는 학살을 당하거나, 산세가 험하고 고립된 지형이나 섬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 역사의 원리이다. 경상도는 첩첩이 산으로 둘러 쌓인 고립되고 험한 산악지대여서, 이런 지형으로는 우성 유전자에 밀린 열등 유전자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지형에서 수천 년이 흐르다 보면 사람들이 폐쇄적이고, 편협하고, 배타적이 된다. 또한 필연적으로 근친교미가 일어나면서 유전자 결함에 의해 종의 퇴행이 진행된다. 이들은 산악으로 쫓겨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외부인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며, 자기들만의 집단의식, 즉 경상도 특유의 우리가 남이가라는 배타적 종족 마인드를 발달시킨다. 고립된 산악 지형 사람들과 섬 사람들은 대개가 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매우 피곤하다. 되도록이면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 

BC 1
세기경 신라와 가야를 건국한 드라비다 타밀 흑인 집단은 남인도에서 출발하여 싱가포르를 거쳐 일본의 이즈모와 한국의 경상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리카 코끼리가 있고, 아시아 코끼리가 있듯이, 아프리카 흑인이 있고, 아시아 흑인이 따로 있다. 이와 관련된 성씨 및 세력은 박, , , , , , , , , (사로 6), 구간 세력, 호공 세력이다. 그 당시 타밀 흑인종은 선진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이었다. 우츠 강철이라는 발달된 제철 기술을 앞세워 경상도의 선주민인 진한(진나라 노예)과 변한왜구를 제압하고 경상도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다.

  • 박혁거세의 이름인 불구내는 인도 남부의 부루구나이라는 바닷가 마을을 지칭한다.  
  • 석탈해는 타밀 대장장이 집단의 우두머리로 추정된다.
  • 김수로와 이진아시 형제의 드라비다 흑인어 이름은 뇌질주일, 뇌질청예이다(석리정전).
  • 허황옥은 인도 남부 아유타국 출신이다(경상도지리지).
  • , , , , , 사로 6촌의 촌장의 이름을 드라비다 흑인어 식으로 표현하면 각각 치빠이코, 구레마, 호친, 치타, 소벌두라이, 아리야판이다. 소벌두라이는 타밀어로 좋은 지도자라는 뜻이다.
  • 참고로, 신라 김씨도 타밀 흑인종 집단이라는 설이 있다.

신라 건국에 참여한 드라비다 흑인인 호공 세력은 왜에서 건너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있고 이 때 조몽 왜구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건국 세력에는 조몬왜구가 포함된다. 가야를 건국한 타밀 흑인종인 구간 세력의 성씨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조몽왜구는 신석기 시대부터 경상도에 거주하던 경상도 토착민이다. 경상도 지역에서 나오는 조몽토기의 연대를 측정하면 5,000년 전의 것으로 나온다.

서라벌은 타밀어로 '황금밭'이라는 의미이고, 가야는 타밀어로 '물고기'라는 의미이다. 서라벌이든 가야든 한국어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으나 타밀어로는 해석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황금밭, 물고기이다.

경상도 지역에서 발견된 하플로그룹 L로 추정되는 특이한 샘플은 이전 Kim Wook 2010 <O2b Korea> 논문에 나온 세개의 L 샘플 중 하나와 매우 유사한 STR(genetic distance =1)을 지니고, 이들 두 샘플은 더 정확히 하위 하플로를 언급하자면, L1b(M317)이나 L1b1(L656)으로 보인다. 이는 인도 드라비다어 계통 민족보다는, 오히려, 아르메니아, 터어키, 혹은 유럽의 사이프러스, 이탈리아 등의 L1bSTR값과 가깝다. <O2b Korea>에서 나머지 두 개는 각각 L1, L1c로 전형적인 인도 드라비다 타밀계 흑인종에 가까우므로, 해상 루트를 통한 한반도의 도래 가능성이 높은 반면, L1b몽골의 고려원정 등을 통한 육상 루트로 도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인용).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라는 글자가 무려 50여 차례가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박혁거세 때부터 ''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또는 왜인은 변한왜구를 가리킨다. 신라와 변한왜구는 신라 초기부터 시작하여 무려 600년에 걸쳐 적대관계를 형성한다. 신라의 주적은 백제도 아니고, 말갈도 아니고, 바로 변한왜구였다.

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고, ''라는 말이 백제본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4세기 말 아신왕 때이다.

삼국사기 강수전에는 '강수는 원래 임나가랑 사람이다'라는 기록이 있고 중국의 역사서 '한원'에는 '가라와 임나는 좌우로 나란히 붙어 있다. 둘 다 신라에 망하였다.'고 나온다. 현대의 지명으로는 김해와 부산에 해당한다. 쉽게 말해 강수는 원래 부산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 ~ 2,000년 전에 임나왜구(부산가야) 지역은 일종의 섬이었다. 울산의 태화강은 지금은 강이지만 위 시기에는 부산 북쪽을 가르는 바다였고, 양산이나 김해 평야도 전부 바다였다. 임나(부산)에서는 배를 이용하여 교통하는 것이 육지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편리했다. 신라 고분에서 나오는 엄청난 양의 금 유물을 보던 이 곳에서 금이 많이 나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 삼각주 지역에 퇴적물이 싸이면서 오늘과 같은 지형이 형성된 것이고 을숙도 등의 섬은 없었다.

부산은 원래 독로국이라는 왜인이 세운 변한의 소국이었다. 그 후 가락국(김해가야)이 부산을 점령하고 의부가라라고 했다가 다시 임나로 명칭을 바꾸었다. 의부가라의 가 부산이라는 현대 지명의 유래이다. 신라에 의해 임라가 망한 후 임나의 주민들은 충청북도 지역으로 사민된다. 그래서 임나() 왕족으로 알려진 김유신의 고향이 충북 진천이고, 강수의 고향이 충북 충주인 것이다.

경상북도와 경상남도는 거의 600년에 걸쳐서 철천지 원수였다. 오로지 원한 관계만 있는 이들이 영남으로 묶여서 매국노 무리인 새누리당의 노예 역할을 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상남도인들은 경상북도인에게 돌려받아야 할 피의 부채가 있고, 경상북도인들은 경남인들에게 이를 피로써 갚아야만 한다. 이러한 역사적 부채 관계를 경남인들은 꼭 기억해야 한다.

일본 서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이름은 기장족희이다. 이는 기장여자라는 의미이고, 쉽게 말해 기장댁이다. 부산에서 태어난 여자니까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경북 김천(감문국) 이남은 변한왜구 지역이기 때문에 신공황후는 한인이 아니고 당연히 부산 독로국 변한왜구이다.  

6
세기 초중엽의 신라에 관한 기록인 양직공도 신라제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한의 소국이고 사라라고도 한다나라가 작아 사신을 보내지 못하다가 모진(법흥왕)이라는 자가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신라는 왜(임나왜구 - 부산)에 속하였다(부용국)."

6
세기 초중엽 법흥왕 이전까지 신라(사라, 계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낸 적이 없었던 경주에 국한된 진한의 소국이었고, 우두머리의 직계 후손을 볼모로 바치는 왜(임나)의 부용국이었다(박제상 참조). 아울러, 마한, 백제, 고구려의 부용국이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경상인은 진나라 노예, 드라비다 타밀 흑인종, 왜인(변한), 조몬왜구, 흉노식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라비다 타밀 흑인종은 발달된 철기 기술을 바탕으로 신라와 가야의 기층 및 지배층 인구를 형성하였다. 이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다.

 

(부록)

한국에서는 성씨를 기준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 조선 초기 인구 가운데 성이 있는 사람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이름이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1896
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철폐될 때에도 성이 없는 사람이 여전히 인구의 60%가 넘었고,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성이 주어졌는데, 이 때 주로 주어진 성씨가 김씨와 박씨였다. 농업 사회에서 양반(elite)의 비중은 3-5%를 넘을 수 없다.

경남의 양반인구가 전국 최저인 0.4%였는데, 경남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신이 전부 양반 후손이라고 말한다. 임나왜구(부산가야) 왕족 김유신의 56대손이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제주도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지역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족보에 편입되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자신이 양반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환단고기, 단기고사와 같은 위서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를 새롭게 날조하여 이를 믿어버리는 것과 똑 같은 일이 족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조선 중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족보는 현대까지 400년에 걸쳐 위조가 이루어진 거대한 사기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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