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 II –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
1609년 경상남도 울산부의 인구 가운데 47%가
노예임을 확인하였다.
1606년 경상남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호적에서 무려 64.4%의 노예 비중을 확인하였다.
일찍이 1690년의 대구부 호적을 통해 확인한 노예 비중은 44.3%였다.
아래는 중종 실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경상도는 큰 도(道)인데도
군대의 정원(定員)은 겨우
2만 명이니, 그것은 천인(賤人)이 많고 양인(良人)이
적으며 또 양인 가운데 다른 역사(役事)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주(慶州) 한 고을만 살펴보아도, 수륙군(水陸軍)의 정병(正兵)과 보정(保丁)을 모두 합쳐야 겨우 9천 명인데 공천(公賤-공노비)은 1만 7천 5백여 명이나 되며 사천(私賤-사노비를 의미함)은 반드시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9천 명의 정원(定員)도 또한 실제수효는 아닙니다.
호적(戶籍)을 고칠 때에 본래의 숫자에 따라서 그 수효만을 허위로 보충해 두었을 뿐으로 절호(絶戶)된 자가 많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생각한 바로는 허위(虛僞)로 늘려놓은 수효를 없애 버리고 현재 있는 대로 호적을 만들거나 또는 백정(白丁)으로 그 정원을 채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나라에서 백정은 다른 종류(種類)로 여겨 군역(軍役)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수령(守令)들의 사역(使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고생이 10배나 되어 도둑이 되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에 있어 사역할 만한 한민(閑民)은 다만 이들뿐입니다.”
중종 21권,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0월 13일(임인) 3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안윤덕 등 14명의 무신이 변방 방비책을 서계하다
경주(慶州) 한 고을만 살펴보아도, 수륙군(水陸軍)의 정병(正兵)과 보정(保丁)을 모두 합쳐야 겨우 9천 명인데 공천(公賤-공노비)은 1만 7천 5백여 명이나 되며 사천(私賤-사노비를 의미함)은 반드시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9천 명의 정원(定員)도 또한 실제수효는 아닙니다.
호적(戶籍)을 고칠 때에 본래의 숫자에 따라서 그 수효만을 허위로 보충해 두었을 뿐으로 절호(絶戶)된 자가 많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생각한 바로는 허위(虛僞)로 늘려놓은 수효를 없애 버리고 현재 있는 대로 호적을 만들거나 또는 백정(白丁)으로 그 정원을 채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나라에서 백정은 다른 종류(種類)로 여겨 군역(軍役)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수령(守令)들의 사역(使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고생이 10배나 되어 도둑이 되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에 있어 사역할 만한 한민(閑民)은 다만 이들뿐입니다.”
중종 21권,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0월 13일(임인) 3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안윤덕 등 14명의 무신이 변방 방비책을 서계하다
아래는 숙종 실록을 발췌한 내용이다:
숙종 62권, 44년(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년) 11월 26일(경자) 2번째 기사
의성 현령 이진망이 전정 환정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만 1천여 구(口)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만 1천여 구(口)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만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만 1천여 구(口)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만 1천여 구(口)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조선 팔도에서 천민 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이다.
조선시대의 신분별 인구 분포를 따져보면 기본적으로 양반은 1 – 3%에
불과하고 중인과 양민이 70% 가량이고, 천민이 30%정도이다. 그런데 경상도의 경우는 노예인구의 비율이 유독 높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그 원인인 듯하다.
짐승의 창자를 먹고,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은 만리장성 이북의 미개한 오랑캐들의 고유한 풍습이고, 특히
시베리아 계통인, 흉노, 에벤키, 야쿠트, 투르크 계열의 종족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동서양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파리보다 妓生數爻가 셋이 더 만타는 晋州를 비롯하야 大邱, 昌原 等地는 妓生의 産地로 유명하다. 京城도 무슨 組合 무슨 組合하고 嶺南妓生專門의 貿易所가 잇스며
경상인 여성은 어려서부터 아비와 오빠나 남동생하고 근친 교미를 해왔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파는데 거부감이 없으므로 당연히 창녀나 기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형이 매우 척박하고 험난하여,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창녀를 수급하는 무역소도 있고 떠돌이, 거지, 장돌뱅이, 보부상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경상도 거지 갱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다).
흔히 경상인은 흉노족이라고 하는데 흉노는 원래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던 종족이었고, 시베리아의 종족들의 주류 하플로 그룹은 C. N, Q였다. 흉노족은 이미 멸종했고, 현재에는 흉노에서 파생된 혼혈 종족들만이
있다. 흉노족과 가까운 족속은 야쿠트, 돌궐, 위구르, 에벤키족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베리아, 실크로드, 중국
서북변 지역은 오랜 시간 동안 종족 간에 너무나 많은 교잡이 이루어져서 혈통을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베리아 흉노 계열은 여러 종족간의 오랜 교잡에 의해 피부색이 황색이 아니라 기분 나쁘고 불결해 보이는
누런색을 띤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인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이다.
결국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이민족인 경상인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고, 이러한 차별이 노예의 수로 구체화된 게 아닌가 싶다. 위의
노예인구 자료와 실록 자료를 보면 경상인은 거의 2명에 1명꼴로, 3명에 2명꼴로 신분이 노예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므로 경상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노예하고 결혼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조선 시대가 끝날 무렵인 갑오경장(1894)까지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이른바 양반이라고 불리는 1-3%에
불과한 극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 계층을 수탈하는, 거의 정체되어 있던 사회였다. 기본적으로 농경 사회에서 엘리트는 전체 인구의 1 -3%를 넘을
수가 없고, 엘리트의 수가 이 비율을 넘어설 경우 최하층의 엘리트부터 하나씩 지배층에서 탈락하여 다시
위의 비율로 회귀하게 된다. 이러한 탈락 현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
갑오경장 이전에 성씨가 있는 사람들은 조선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오경장으로부터 다시 1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비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평민들이나 노예들은 성이 없었기 때문에 성이 없는 사람이 80-90%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 밖에 안됐다는 의미이다.
갑오경장(1894)에 의해 조선시대 노예제도가 비로소 폐지되면서 사람들에게 성이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 가장 많이 부여된 성이 바로 김씨와 박씨이다. 그러므로 현재
김씨 박씨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김씨 박씨가 아닐 확률이 더 높다. 특히 위의 데이터에서 보듯이 노예들에게
주어진 성이 김씨 박씨였고, 노예의 숫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상도였으니까 경상도의 김씨 박씨라면 실제로는
김씨 박씨가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 결론은 현재 김씨 박씨들은 진짜 김씨 박씨들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노예 신분의 가짜 김씨 박씨일 수밖에 없고 경상도는 특히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경상도는 이민족 특유의 악습들을 가지고 있다. 경상인은
짐승의 창자인 곱창 막창을 먹는 습성이 있다. 지금은 조리를 해서 먹지만 원래는 생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변을 받아서 세수를 하는 습관과 인육을 먹는 식인종 풍습이 있었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선조] :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윤두수]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대구)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선조실록』권46 선조26년 12월 임자(3일)]
[윤두수]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대구)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선조실록』권46 선조26년 12월 임자(3일)]
그리고 더욱 경악할만한 사실은 경상인은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삼국사기 제3권
내물 마립간 條]
논(論)하건데, 아내를 얻는데 있어서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인륜의 분별을 두텁게하는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노공(魯公=昭公)은 오(吳)에서 아내를 취하였다. 진후(晉候=平公)가 넷의 희씨(姬氏)성을 가진 넷의 부인을 둔데 대하여 진(秦)의 사패(司敗=官名)와 정(鄭)의 자산(子産=公孫僑)은 이를 심히 나무랐다. 그런데 신라(新羅)에서는 동성(同姓)을 아내로 취하는 것을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질(子姪)이나 할머니 어머니의 종자매(從姉妹)를 모두 아내로 맞으니, 비록 외국과 서로 풍속이 다르다하여 중국(中國)의 예의 법속으로 이를 책망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그러나 흉노(匈奴)들이 그 어미를 증(蒸=奸)하고 아들을 보(報=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하겠다.
[신라본기 제3 奈勿이사금]
論曰.取妻不取同姓.以厚別也.是故魯公之取於吳.晉候之有四姬.陳司敗鄭子産
深譏之.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已.兄弟子姑姨從姉妹.皆聘爲妻.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則大悖矣.若匈奴之蒸母報子.則又甚於此矣
논(論)하건데, 아내를 얻는데 있어서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인륜의 분별을 두텁게하는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노공(魯公=昭公)은 오(吳)에서 아내를 취하였다. 진후(晉候=平公)가 넷의 희씨(姬氏)성을 가진 넷의 부인을 둔데 대하여 진(秦)의 사패(司敗=官名)와 정(鄭)의 자산(子産=公孫僑)은 이를 심히 나무랐다. 그런데 신라(新羅)에서는 동성(同姓)을 아내로 취하는 것을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질(子姪)이나 할머니 어머니의 종자매(從姉妹)를 모두 아내로 맞으니, 비록 외국과 서로 풍속이 다르다하여 중국(中國)의 예의 법속으로 이를 책망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그러나 흉노(匈奴)들이 그 어미를 증(蒸=奸)하고 아들을 보(報=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하겠다.
[신라본기 제3 奈勿이사금]
論曰.取妻不取同姓.以厚別也.是故魯公之取於吳.晉候之有四姬.陳司敗鄭子産
深譏之.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已.兄弟子姑姨從姉妹.皆聘爲妻.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則大悖矣.若匈奴之蒸母報子.則又甚於此矣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2,000년 전인 신라 때에도 만연했다고
기록된 경상인의 고유 풍속이다.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이 경상인의 근친상간
풍속이 여전한 것을 보고 경악을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노하여 조선의 임금을 질책하자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 바로 동성 동본 불혼
법이다.
그러나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동성간 결혼을 하는 그런 소프트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런 동성동본 불혼법은 그다지 효과적이기 어려웠다. 경상도에
있어서 근친상간의 문제는 남매 간에, 부모 자식 간에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위의 사료에서는 어미가 아들하고 교미하고, 아비가 딸하고 교미를
한다고 나와있고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원래 시베리아 계통(c. n, q)에서 파생된 종족들에게 이러한
근친 상간과 식인종 풍습이 흔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어미와 아들이 교미를 해서 여아를 낳았다면 이는 아들의 입장에서 딸인가, 여동생인가? 아비와 친딸이 교미를 하여 남아를 낳았다면 이는 딸의
입장에서 아들인가, 아니면 남동생인가? 이런 일은 과거 신라
때부터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근친상간은 경상도에서 일상적이고도 만연된 풍습이다.
28세의 경상도 처자가 있다고 하자. 타지
사람이 이 경상도 처자와 결혼하기 위해 인사를 하고자 처자의 집안에 방문한다. 그런데 집에 갔더니 8살짜리 남동생이 있다. 처자는 엄마가 낳은 늦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동생은 엄마가 낳은 늦동이가 아니라 사실은 처자 자신이 아비와 교미를 해 낳은 아들이자 남동생인
것이다. 근친상간은 경상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두가
쉬쉬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는 편인데, 조금만 들춰보면 추잡하고 경악할만한 실상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러한 경상인의 근친상간 풍속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상도
특유의 폐쇄성과 고립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심각한 유전적,
정신적 장애를 가져온다. 그래서 경상도에는 유전질환자, 정신병자, 지적장애자, 사회부적응자, 연쇄살인자, 방화범, 강간범, 사기꾼, 파렴치한, 폐륜아들이 많다. 경상인의 특수한 근친상간 문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성, 고립된 지형이 어우러져 낳은 결과물이
바로 일베충이다.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은 거의 2명에 1명꼴, 3명에 2명꼴이고, 이러한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기 때문에, 경상인을 만나면
대개가 노예를 만나는 셈이 된다. 조선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 년 정도 전인 갑오경장 때이다. 위에서 김씨 박씨를 거론했지만, 김씨 박씨가 가장 수가 많다는 것일 뿐,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다. 오가작통법은 노예가 주인의 성씨로 호적에 기록되는 제도이다. 즉
주인의 성씨를 따라서 노예의 성씨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족보와 신분을 사고 파는 일이나 족보를
날조하는 일은 조선 시대에 비일비재했다. 조선 중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족보는 사문서에 불과하고, 현대
사회에서도 공문서가 버젓이 날조되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 사문서인 족보 따위를 조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집성촌이나 종가집 같이 허무맹랑한 사실은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다.
경상인이 자신의 자녀나 친척을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록들이 있는 점으로 볼 때 경상인은 인신매매의 시초이다. 경상인 여성도 또한 문제이다. 경상인은 기생, 매춘부, 심지어 해외 원정 창녀의 원조 내지 온상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하다. 근친교미의 환경에서 자란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래의 인용들을 보자.
특히
普州 妓生이 名하고 慶尙道 色酒家가 名하지오. 엇던 방면으로 좀 수치스러운 듯하나 蝎甫가 만키론 慶尙道가
제일이요.(일동은 하하하 하고 우섯다.)
(해설 - 진주 기생이 유명하고 경상도 색주가가 유명하지요. 어떤 면으로는 좀 수치스러운 듯하나 갈보가 많기로 경상도가 제일이지요)
朝鮮의
到處는 말도 말고 南北滿洲, 西伯利亞, 멀니 北海道까지 慶尙道産의
賣春婦가 안이면 모다가 寂寞江山일테요.(일동은 올소하고 웃는다.)
(해설 - 조선의 도처는 말도 말고 남북 만주, 시베리아, 먼 북해도까지 경상도산의 매춘부가 없으면 모두 적막강산이지요)
개벽
제61호 발행년월일 1925년 07월 01일
파리보다 妓生數爻가 셋이 더 만타는 晋州를 비롯하야 大邱, 昌原 等地는 妓生의 産地로 유명하다. 京城도 무슨 組合 무슨 組合하고 嶺南妓生專門의 貿易所가 잇스며
(해설 -파리보다 기생 숫자가 셋이 더 많다는 진주를 비롯해서
대구, 창원 등지는 기생의 산지로 유명하다. 경성도 무슨
조합 무슨 조합하고 영남기생전문의 무역소가 있다)
-
이광수의 증언
경상인 여성은 어려서부터 아비와 오빠나 남동생하고 근친 교미를 해왔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파는데 거부감이 없으므로 당연히 창녀나 기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형이 매우 척박하고 험난하여,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창녀를 수급하는 무역소도 있고 떠돌이, 거지, 장돌뱅이, 보부상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경상도 거지 갱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다).
그래서 돈 좀 벌었다 싶은 경상인은 다른 경상인하고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고, 타지 사람들하고만 결혼한다. 경상인이 대개 노예라는 점과, 경상인의 근친상간 문화와 식인종 풍속을 누구보다도 잘아는 사람은 바로 경상인 자신이다. 게다가 근친교미 환경에서 자란 경상인 여자들은 제멋대로 몸을 파는 창녀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세와 대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집안이 콩가루가 되기 십상이고 폐가 망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어느 경상인이 다른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은 서두의 실례에서 보듯이 경상인은 대개 2명중 1명꼴로, 3명 중 2명꼴로 노예였다는 것이고, 현대의 경상인은 그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이고, 경상인이 노예라는 속박에서
풀린 지는 1894년의 갑오경장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 정도밖에 안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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