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1일 금요일

경상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

경상인의 차별의 역사를 보려면 우선 이들의 인구 구성부터 알아야 한다.  

BC3세기 경 중국 서북변(감숙성, 신장 지방)에서 진나라의 노예로 붙잡혀서 만리장성을 쌓던 노예들이 정국의 혼란을 틈타 한반도로 도망하여 마한에 투항하자 마한이 이들을 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진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고 하였다. 진한은 유이민이었던 까닭에 스스로 우두머리를 세우지 못하고 마한의 다스림을 받았다. 마한인들은 이들을 멸시하여 "찐따 새끼"라고 불렀는데 이는 "진나라 새끼", "진한 새끼"라는 말이다. 경상도에서 발원한 성씨는 이들 진나라 노예의 성씨로 추정된다. 진한의 기층을 이루었던 이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경상인에 대한 차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양직공도 신라제기에 따르면 신라는 6세기 중엽 모진(법흥왕) 때까지 진한에 속한 소국이었다.
청동기 시대의 경상도는 인구가 매우 희박하여 철기를 가지고 들어온 이주민들에 의해 청동기 시대 경상인은 몰살되거나 이들에게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청동기 경상인은 현대 경상인의 직접 조상이 아니다.

이들 진나라 노예들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민족인 것은 확실한데,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료나 유물은 없다. 당시의 중국 서북변은 근본도 없는 수백종의 미개 부족들이 섞여서 살았고, 따라서 순수 민족이 거의 없고 대개 혼혈 잡종들이다. 유물도 거의 없고, 문자도 없던 떠돌이 미개인들이었기 때문에 사료나 유물을 통해 이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현재 신장, 위그르, 감숙성 지방에 남아있는 몇몇 오랑캐 미개인 종족하고 비슷하지 않겠냐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최치원은 노예들이 연나라에서 도망온 놈들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드라비디언 계통의 흑인종인 타밀인은 BC 1세기 경에 일본의 이즈모와 경상도에 진출하였고,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를 건국하였다. 현재 타밀 흑인종 성씨는 박, 석, 김, 허, 사로 6성(정, 배, 설, 손, 최, 이)이 있다. 가야의 구간 세력도 타밀 흑인종이고 이들의 성씨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의 건국에는 왜에서 건너온 호공 세력, 일본인, 아랍인도 참여하였다. 신라와 가야는 거의 5세기까지 백제, 고구려, 왜의 부용국으로 차별을 받았다. 

경상인들은 고려, 조선 시대 1,000년에 걸쳐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심한 차별을 받았다. 소백산맥과 낙동강은 배산역수이다.

중국의 마구간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하자 경상도에서 신라 재건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고, 고려 정부는 경남 밀양의 오치재에서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 때 얼마나 많은 경상인이 죽었는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아울러 경상도 정치 세력은 고려 초기인 광종 때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400년에 걸쳐 심한 차별을 받았다. 경상인에게 소백산맥이란 차별의 상지이라 할 수 있다.

훈요십조의 원문에서 왕건이 "낙수 (낙동강) 이남, 조령 (문경새재) 밖(즉 다름 아닌 지금의 경상도)을 배제하라"고 유시한 걸 경상도 출신 최항, 최제안이 교묘하게 "금강 이남, 탄현 밖"이라고 바꿔 치기하였다. (이는 한국 학계에서도, 심지어 친일사학자로 분류된 이병도한테서도 객관성을 평가 받는 일본 사학자 이마니시 류 (今西龍)가 제기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학설이다.)

1200년 초반 고려 무신 정권 당시, 경주 토호 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라 부흥운동이 있었다. 이는 한국인의 지독한 경상인 차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지역 반란의 성격이고, 지금으로 치면 경상도 분리 독립운동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고려 무신 정권은 반란이 일어나자 이의 진압에 나섰고, 경주 토호들이 이미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잔당들을 가혹하게 소탕하였다. 미개한 이민족이 감히 한국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렇듯 강경한 진압을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남인 계열의 영남학파는 경상도 지역당인데, 그 당시 경상도의 서원은 반란소굴이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이다. 경상인이 정계에 진출했다고 하나, 대부분이 한직, 즉 정권과는 거리가 먼 직책들이었고, 임금들이 경상인은 절대로 중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란, 노예의 난 등의 반란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경상도 차별과 관련해 가톨릭대 사학과 박광용 교수는 1679년 기사환국( 己巳換局)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정치적으로 소외됐었다고 지적한다. 박 교수에 따르면 기사환국 이후 남인은 1백년이 넘도록 정승에 기용되지 못 하는 등 노론의 견제를 당했다. 노론은 17세기말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 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는 데 동조한 남인을 ‘명의죄인’(名義罪人) 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멍에를 씌웠다. 그런 영향으로 19세기 이후에도 남 인의 정치세력화는 사실상 막혀 있었다. 대한제국에 이르러서야 부분적으 로 해소됐다. 1900년대 초까지 200년이 훨씬 넘는 기간이다. 

그리고 조선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영남이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를 진압하고 영남을 영원한 배역지로 정하고 대구 남문 입구에 영남토벌비를 세우고 경상인의 출사(벼슬)를 금지했다. 경상인들은 영남토벌비를 차별의 원인인냥 이야기 하는데, 영남 토벌비는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차별의 결과였고, 차별의 강화를 낳았을 뿐이다. 그 전부터 이민족 배역지라 하여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계속 차별을 받아왔다. 영남토벌비는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조차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반란 평정비이다. 반란 평정비는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지역에도 없다.

1,600년대 경남 울산의 노예 인구는 울산 전체 인구의 47% 이상이었고, 경북 경주의 노예 인구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아울러 경북 대구의 노예 인구는 44.3%, 경남 산청은 무려 64%, 경북 의성은 거의 100%였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울산, 경주, 대구, 산청, 의성은 거의 2명에 1명꼴로, 5명에 3-4명 꼴로, 10명에 10명꼴로 노예 신분이었다. 이는 중종 실록, 숙종 실록, 조선시대 호적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예 인구의 비율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마 이민족 차별이 그 원인인 듯하다. 그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노예하고 결혼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돈 좀 벌었다 하는 경상인은 절대로 다른 경상인과 결혼하지 않고, 한사코 타지 사람들과 결혼을 하는데, 경상인의 비천한 노예 신분에 대해서는 경상인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 아비의 이름이 이덕쇠인가되는데 '~쇠'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천민의 이름이다. 종미노예반란역적 다까끼의 구미 생가는 단칸 흙집인데 전형적인 천민 주거지이다.

해방 이후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대구폭동 역시 조선 시대 서인 정권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의 경상도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웠다. 다까끼와 인척 관계인 박상희도 총살되었다 

6.25 내전이 일어났을 이승만 대통령은 목포를 거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신하면서 이른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경상도에서 학살했다. 실례로 경산 뼈동굴에 있는 학살자의 수는 3,500명에 이른다. 이민족인데다가 공산주의 사회전복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가차 없이 학살한 것이다. 마치 게르만족인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처럼 한국인이 소수민족인 경상인을 학살한 것이다. 역시 뿌리 깊은 이민족 차별의 결과이다. 경상인을 몰살하다시피 한 이승만을 경상인이 국부니 뭐니 하면서 숭배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종미노예인 다까끼 마사오의 반란으로 정권을 잡으며 경상도 역사에 대한 미화, 왜곡, 날조, 은폐, 조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국 최대의 유배지 중 하나는 경상도의 거제도였다. 남해, 통영, 울산, 경주, 대구, 고성, 부산, 김해, 창원 전부 유배지였다. 이 유배지 놈들이 종미노예인 다까끼 반란으로 지금은 세계 최고의 조선소도 있고, 컨테이너 항구도 있고, 인구도 엄청 많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래서 경상인들이 2,000년이 넘는 차별의 역사를 해소해준 다까끼를 숭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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