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31일 목요일

임나가야의 위치와 역사(경상남도 부산에서 경상북도 김천까지)






삼국사기 강수전에 따르면 "강수는 원래 임나가랑 사람"이라고 나와 . 여기다가 강수가 중원경 출신이고 김유신의 후예라는 기록도 . 그리고 중국의 역사서 '한원' 따르면 '가라와 임나는 좌우로 나란히 붙어있다. 신라에 망하였다" 나와 . 여기서 임나는 부산(기장, 동래) 말하고, 가라는 김해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박혁거세 기록부터 ''라는 기록이 나오고, 신라본기에는 5세기까지 ''라는 글자가 끊임없이 나오는데, 거의 50여차례라고 보면 된다. 박혁거세는 BC 50년 경부터 등장하는 인물이니까 이 때부터 서나벌 근처에 왜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신라본기를 보면 신라와 왜는 계속 싸우기도, 화친하기도 하고, 신라가 왜에 복속되기도 한다(박제상 참조). 반면 백제본기하고 고구려본기에는 왜라는 글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 백제본기에 ''라는 글자가 처음 출현하는 것은 4세기 말이 

그리고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 '출운'이라는 지명이 있다. 바로 그곳이 사서에 나오는 다파나국이라는 곳이. 또는 용성국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석탈해 집단이 경상도로 들어왔. 그곳 출운시가 바로 (구주)에서 동북 천리 떨어진 곳이, 석탈해는 자신이 왜에서 동북천리 떨어진 곳, 즉 용성국에서 왔다고 진술했다. 석탈해 집단은 우츠 강철이라는 선진 철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 그리고 신라의 건국세력 하나인 호공 세력도 ''에서 왔다고 사료에 기록되어 . 호공은 특이하게 박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온다. 이들 왜에서 온 이주민들은 신라의 건국세력이자 지배세력 하나이다.

그리고 경북 김천 또한 임나가 지배했다는 설이 . 대가야가 경북 김천(감문국) 왜(변한)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임나 가야의 원래 이름은 의부 가라이고 훗날 임나로 변경되었다. 임나 안에는 10개의 소국이 있고, 이들 소국들은 임나에 예속되는 시기도 있고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도 있다.

나아가 경상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양직공도 신라제기' 알아야 한다.

양직공도 신라제기에 따르면 '신라는 진한의 소국이고, 사라 또는 계림이라고도 한다. 나라가 작아 사신을 보내지 못하다가 모진(법흥왕)이라는 자가 처음으로 백제를 따라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신라는 왜에 속하기도, 한에 속하기도 한다"

문장에 따르면 6세기 중엽까지 신라는 진한에 속한 소국이었기 때문에, 만약 6세기의 지도를 그린다면 신라의 영역을 경주(서라벌) 국한시켜야 하고, 현재 교과서들에 신라로 표시된 영역을 진한으로 고쳐야 한다. 가라는 김해, 임나는 부산과 경북김천을 거쳐 진주를 아우르는 삼각형 영역으로 그려 는다. 그리고 나머지 지역(충청도와 전라도) 전부 백제로 표시하면 정확한 6세기 한반도 지도가 온다. 그리고 경기도, 강원도, 경북 일부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그때까지 신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지 못했고, 와 고구려의 부용국이었.

출운이라는 지역은 일본어로 이즈모라고 발음한다. 왜에서 신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집단은 석탈해 집단과 호공 집단이 있다. 그런데 정황상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 건국 세력이었던 사로 6촌 집단도 출운(이즈모)에서 경주(서나벌) 것으로 추정된다.

정리하자면 부산(동래, 기장) 철기 시대가 시작될 때 상도 지역으로 이주한 세력이 강성해져 임나(의부가라)를 세웠고 임나는 시간이 지나며 진한 및 신라와 경쟁하며 경남, 경북까지 판도확대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다가 6세기 중엽 신라에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의부가라라는 명칭은 훗날 부산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다.


시기 동안 상당한 격변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격변들을 설명하는 사료가 별로 . 그래서 지역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 임나 안에는 10개의 나라가 있고, 이들은 독립적인 소국들로 활동하기도 하고 임나에 복속되기도 한다. 대가야(고령) 남가라(김해) 일단 임라의 속국으로 보면 된다. 대가야, 남가라 같은 소국들이 사료에 드문드문 나오는 이유는 이들이 임나에 복속된 상태에서는 임나로 기록되기 때문에 사료에 나오지 않고 독립된 상태에서만 소국으로 사료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특정 가야 소국의 기록들이 사료에 거의 100년의 시간차를 두고 등장하는 사례들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임나가 망할 무렵에는 임나에 속한 10국이 대부분 망한 상태였고, 임나의 영역은 부산(기장, 동래)으로 축소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경상도 갱갱이의 유래

흔히 경상인들을 '갱갱이' 또는 '깽깽이'라고 부른다.
경상도는 원래 지세가 척박하여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라서, 타지역에 비해 거지, 장돌뱅이, 기생, 떠돌이, 보부상, 백정, 등이 많았다. 즉 찢어지게 가난하여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거지, 장돌뱅이, 보부상, 떠돌이경상인들이 겨울이 되면 척박한 경상도를 떠나 먹을 것을 찾아 타지로 들어간다. 그런데 경상인들은 '여'라는 발음을 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경상도를 '갱상도', 경제를 '갱제, 경주를 '갱주'라고 부른다.

그래서 타지 사람들에게는 그 발음이 특이하게 들렸으므로 사람들은 '아 그 갱갱갱 하는 애 있잖아', '그 갱갱거리는 애가 말이야' 이런 식으로 경상인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상인의 별칭이 '갱갱이' '깽깽이'가 된 것이다.

2015년 10월 6일 화요일

경상인은 식인종의 후손이다.


경상인은 식인종의 후손이다

 
현대 경상인의 조상은 BC 3세기경 중국의 진나라 때 정국의 혼란을 틈타 노역을 피해 도망쳐 온 노예들이다. 만리장성을 쌓는데 동원되었던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단 장성을 쌓으려면 막대한 인력과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불도저나 백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력을 이용해서 성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 축조는 세계 최대의 토목공사였으므로 아마도 수십만의 노예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이들 노예는 이민족 오랑캐, 죄수, 노예, 부랑자, 거지, 전쟁 포로 등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만리 장성 밖의 영역은 무법지대이다. 무법지대란 문명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야만인, 미개인의 지역을 말한다. 법이 없다 보니, 오로지 제어되지 않는 물리력,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만이 통용되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에는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중국의 군대는 국경 주변을 떠돌아 다니는 온갖 오랑캐 유목종족들을 붙잡아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노예로서 충당하였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자 노예 관리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노예들이 대거 도망치기 시작한다. 이렇게 도망친 노예 중 일부가 한반도로 도망하여 마한에 투항하자 마한이 이들을 동쪽 경계의 땅(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중국의 진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고 불렀다. 이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다. 최치원의 경우에는 이들이 연나라에서 도망한 놈들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흉노족이라고 알려진 오랑캐 미개인은 하플로 그룹 C, N, Q가 주류인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던 오랑캐들인데, 이들은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세와 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교미를 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 풍습이 있고, 짐승의 곱창 막창을 생으로 먹는 습성이 있었다.  

세와 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교미라는 것은 아비와 딸이 교미를 하고, 아들과 어미가 교미를 하여 촌수를 구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여자를 하나의 가축으로 취급했고 염소나 양처럼 소유물로 여겼다. 이는 자연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짐승들의 습성과 전혀 다를 게 없다.  

만리장성 이북의 오랑캐들은 식인 부족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쌍각양(雙脚羊)이라는 것은 두 다리를 가진 양이라는 말이다. 쌍각양이란 사람, 특히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흉노, , 모용, 정령, 탁발 등의 종족은 여자들을 전쟁 중에 군량으로 사용하였다. 이 미개한 식인종들은 전쟁을 하다가 여자들을 포로로 잡아 와서는 마치 가축을 기르듯이 기르면서 교미를 하고 잡아 먹었다. 일부 북방 오랑캐의 식인 행위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보편적 풍습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이다. 그런데 법흥왕의 이름이 사서에서는 모진으로 나온다. 라는 성은 모용 씨족을 말하는 것이고, 모용씨는 악명 높은 식인종이다.

중국인들이 만리장성 이북의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이 세와 대를 구분하지 않는 근친교미를 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회 결속을 해치는 근친교미와 식인 행위는 떠돌이 종족에게는 몰라도 정주생활을 하는 농경 민족에게는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게 된다. 즉 사회 체계가 와해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중국인들은 북방의 흉노 등의 식인종들을 계속해서 토벌하였고, 급기야 흉노 등의 식인종이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흉노 이외에도 여러 식인종들이 멸종되어, 지금은 이들의 후손을 찾아볼 수 없다.

만리장성 이북은 법, 질서, 예의, 도덕 이런 게 존재하지 않는 한마디로 온갖 종류의 식인 종족들이 떠돌아 다니며 살던 짐승들의 세상이었다. 약탈, 살인, 강간, 근친교미, 식인 등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른바 마적이라는 도둑떼들이 여전히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식인 종족 가운데 일부가 현재 경상도에 있다. 그래서 신라 때부터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경상도에서는 근친교미와 식인 풍습이 계속해서 전해져 왔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선조] :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
윤두수]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대구)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
『선조실록』권46 선조26 12월 임자(3)]

 
그리고 식인종 사건은 경상도에서 아직도 발생하고 있다. 경상남도 조폭 이순철은 사람을 살해하고 사체를 해체한 후 간을 꺼내 술안주로 먹은 사건은 정말 유명하다. 이는 경상도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식인종 문화가 일시적으로 드러난 사건일 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할 뿐, 경상도에서 식인 풍습은 여전히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근친교미는 현재 경상도에 널리 만연하고 있다. 다만 식인, 근친교미가 예민한 문제이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경상인과 결혼을 하거나, 경상인과 사업을 하거나, 경상도로 여행을 가거나 하는 무모하고 위험한 행위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경상인이 식인종의 후손이라는 게 정말 소름이 끼치는 노릇이고 믿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는 진실이다. 중국인들은 식인종인 흉노를 여러 차례 토벌에 의해 멸종시켰다. 우리도 하루 빨리 더러운 식인종 피의 확산을 차단하고 한국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2015년 10월 2일 금요일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 II -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 II –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  

 

1609년 경상남도 울산부의 인구 가운데 47%가 노예임을 확인하였다.

1606년 경상남도 단성현(현 산청군)의 호적에서 무려 64.4%의 노예 비중을 확인하였다.

일찍이 1690년의 대구부 호적을 통해 확인한 노예 비중은 44.3%였다.

 

아래는 중종 실록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경상도는 큰 도()인데도 군대의 정원(定員)은 겨우 2만 명이니, 그것은 천인(賤人)이 많고 양인(良人)이 적으며 또 양인 가운데 다른 역사(役事)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주(慶州) 한 고을만 살펴보아도, 수륙군(水陸軍)의 정병(正兵)과 보정(保丁)을 모두 합쳐야 겨우 9천 명인데 공천(公賤-공노비) 1 7 5백여 명이나 되며 사천(私賤-사노비를 의미함)은 반드시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9천 명의 정원(定員)도 또한 실제수효는 아닙니다
.

호적(戶籍)을 고칠 때에 본래의 숫자에 따라서 그 수효만을 허위로 보충해 두었을 뿐으로 절호(絶戶)된 자가 많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생각한 바로는 허위(虛僞)로 늘려놓은 수효를 없애 버리고 현재 있는 대로 호적을 만들거나 또는 백정(白丁)으로 그 정원을 채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

나라에서 백정은 다른 종류(種類)로 여겨 군역(軍役)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수령(守令)들의 사역(使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고생이 10배나 되어 도둑이 되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에 있어 사역할 만한 한민(閑民)은 다만 이들뿐입니다
.”

중종 21, 9(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 10 13(임인) 3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안윤덕 등 14명의 무신이 변방 방비책을 서계하다


아래는 숙종 실록을 발췌한 내용이다:



           숙종 62, 44(1718 무술 / 청 강희(康熙) 57) 11 26(경자) 2번째 기사

          의성 현령 이진망이 전정 환정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다
그러다가 이 고을로 옴에 이르러 시노비(寺奴婢)의 원통하고 고통스러움이 특히 심한 것을 보고, 신이 신의 고을 인구(人口)를 조사해 보니 모두 5 6천 남짓한데, 그 가운데 2 1천여 구()가 모두 시노비였습니다.

그리고 2 1천여 구() 가운데 또 수천구(數千口)가 모두 유리(流離)하거나 도망하여 인족(隣族)으로 하여금 〈부역을〉 대신 감당하게 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이 고을 인구의 절반이 시노비이고, 시노비의 인족이 되는 자가 또한 고을 인구의 절반이 되니, 온 고을이 시노(寺奴)의 구실에 시달리지 않는 자가 대체로 얼마 안 됩니다.

  
정리하자면, 경남 울산, 경남 산청, 경북 대구의 노예 인구는 각각 47%, 64.4%, 44.3%이고, 경상북도 경주의 경우 중종 실록의 내용으로 유추하자면 노예 인구 비율이 경남 산청 보다 더 높을 듯하다. 그리고 경북 의성은 노비종모법에 의해 거의 100%의 노예 인구 비율을 보인다.

조선 팔도에서 천민 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이다

선시대의 신분별 인구 분포를 따져보면 기본적으로 양반은 1 – 3%에 불과하고 중인과 양민이 70% 가량이고, 천민이 30%정도이다. 그런데 경상도의 경우는 노예인구의 비율이 유독 높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그 원인인 듯하다 
 
흔히 경상인은 흉노족이라고 하는데 흉노는 원래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던 종족이었고, 시베리아의 종족들의 주류 하플로 그룹은 C. N, Q였다. 흉노족은 이미 멸종했고, 현재에는 흉노에서 파생된 혼혈 종족들만이 있다. 흉노족과 가까운 족속은 야쿠트, 돌궐, 위구르, 에벤키족 정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베리아, 실크로드, 중국 서북변 지역은 오랜 시간 동안 종족 간에 너무나 많은 교잡이 이루어져서 혈통을 정확히 식별하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베리아 흉노 계열은 여러 종족간의 오랜 교잡에 의해 피부색이 황색이 아니라 기분 나쁘고 불결해 보이는 누런색을 띤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인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이다.  

결국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이민족인 경상인에 대한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고, 이러한 차별이 노예의 수로 구체화된 게 아닌가 싶다. 위의 노예인구 자료와 실록 자료를 보면 경상인은 거의 2명에 1명꼴로, 3명에 2명꼴로 신분이 노예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므로 경상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노예하고 결혼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조선 시대가 끝날 무렵인 갑오경장(1894)까지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이른바 양반이라고 불리는 1-3%에 불과한 극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 계층을 수탈하는, 거의 정체되어 있던 사회였다. 기본적으로 농경 사회에서 엘리트는 전체 인구의 1 -3%를 넘을 수가 없고, 엘리트의 수가 이 비율을 넘어설 경우 최하층의 엘리트부터 하나씩 지배층에서 탈락하여 다시 위의 비율로 회귀하게 된다. 이러한 탈락 현상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

갑오경장 이전에 성씨가 있는 사람들은 조선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오경장으로부터 다시 1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비율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평민들이나 노예들은 성이 없었기 때문에 성이 없는 사람이 80-90%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성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 밖에 안됐다는 의미이다.

갑오경장(1894)에 의해 조선시대 노예제도가 비로소 폐지되면서 사람들에게 성이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그 때 가장 많이 부여된 성이 바로 김씨와 박씨이다. 그러므로 현재 김씨 박씨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김씨 박씨가 아닐 확률이 더 높다. 특히 위의 데이터에서 보듯이 노예들에게 주어진 성이 김씨 박씨였고, 노예의 숫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상도였으니까 경상도의 김씨 박씨라면 실제로는 김씨 박씨가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 결론은 현재 김씨 박씨들은 진짜 김씨 박씨들이라기보다는 대부분이 노예 신분의 가짜 김씨 박씨일 수밖에 없고 경상도는 특히 그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경상도는 이민족 특유의 악습들을 가지고 있다. 경상인은 짐승의 창자인 곱창 막창을 먹는 습성이 있다. 지금은 조리를 해서 먹지만 원래는 생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변을 받아서 세수를 하는 습관과 인육을 먹는 식인종 풍습이 있었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선조] :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
윤두수]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대구)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軍官)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
[
『선조실록』권46 선조26 12월 임자(3)]

 
짐승의 창자를 먹고,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 것은 만리장성 이북의 미개한 오랑캐들의 고유한 풍습이고, 특히 시베리아 계통인, 흉노, 에벤키, 야쿠트, 투르크 계열의 종족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동서양의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더욱 경악할만한 사실은 경상인은 근친상간을 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삼국사기 제3권 내물 마립간 條]
()하건데, 아내를 얻는데 있어서 같은 성씨를 취하지 않는 것은 인륜의 분별을 두텁게하는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노공(魯公=昭公)은 오()에서 아내를 취하였다. 진후(晉候=平公)가 넷의 희씨(姬氏)성을 가진 넷의 부인을 둔데 대하여 진()의 사패(司敗=官名)와 정()의 자산(子産=公孫僑)은 이를 심히 나무랐다. 그런데 신라(新羅)에서는 동성(同姓)을 아내로 취하는 것을 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질(子姪)이나 할머니 어머니의 종자매(從姉妹)를 모두 아내로 맞으니, 비록 외국과 서로 풍속이 다르다하여 중국(中國)의 예의 법속으로 이를 책망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그러나 흉노(匈奴)들이 그 어미를 증(=)하고 아들을 보(=)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하겠다
.
[
신라본기 제3 奈勿이사금
]
論曰.取妻不取同姓.以厚別也.是故魯公之取於吳.晉候之有四姬.陳司敗鄭子産

深譏之.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已.兄弟子姑姨從姉妹.皆聘爲妻.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則大悖矣.若匈奴之蒸母報子.則又甚於此矣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2,000년 전인 신라 때에도 만연했다고 기록된 경상인의 고유 풍속이다.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이 경상인의 근친상간 풍속이 여전한 것을 보고 경악을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자 황제가 노하여 조선의 임금을 질책하자 황급히 만들어진 것이 바로 동성 동본 불혼 법이다.

그러나 경상인의 근친상간은 동성간 결혼을 하는 그런 소프트한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런 동성동본 불혼법은 그다지 효과적이기 어려웠다. 경상도에 있어서 근친상간의 문제는 남매 간에, 부모 자식 간에 교미를 한다는 점이다. 위의 사료에서는 어미가 아들하고 교미하고, 아비가 딸하고 교미를 한다고 나와있고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원래 시베리아 계통(c. n, q)에서 파생된 종족들에게 이러한 근친 상간과 식인종 풍습이 흔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어미와 아들이 교미를 해서 여아를 낳았다면 이는 아들의 입장에서 딸인가, 여동생인가? 아비와 친딸이 교미를 하여 남아를 낳았다면 이는 딸의 입장에서 아들인가, 아니면 남동생인가? 이런 일은 과거 신라 때부터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쉬쉬하고 있을 뿐이지, 근친상간은 경상도에서 일상적이고도 만연된 풍습이다.

28세의 경상도 처자가 있다고 하자. 타지 사람이 이 경상도 처자와 결혼하기 위해 인사를 하고자 처자의 집안에 방문한다. 그런데 집에 갔더니 8살짜리 남동생이 있다. 처자는 엄마가 낳은 늦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동생은 엄마가 낳은 늦동이가 아니라 사실은 처자 자신이 아비와 교미를 해 낳은 아들이자 남동생인 것이다. 근친상간은 경상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모두가 쉬쉬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는 편인데, 조금만 들춰보면 추잡하고 경악할만한 실상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러한 경상인의 근친상간 풍속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상도 특유의 폐쇄성과 고립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그리고 심각한 유전적, 정신적 장애를 가져온다. 그래서 경상도에는 유전질환자, 정신병자, 지적장애자, 사회부적응자, 연쇄살인자, 방화범, 강간범, 사기꾼, 파렴치한, 폐륜아들이 많다. 경상인의 특수한 근친상간 문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인성, 고립된 지형이 어우러져 낳은 결과물이 바로 일베충이다.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은 거의 2명에 1명꼴, 3명에 2명꼴이고, 이러한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기 때문에, 경상인을 만나면 대개가 노예를 만나는 셈이 된다. 조선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 년 정도 전인 갑오경장 때이다. 위에서 김씨 박씨를 거론했지만, 김씨 박씨가 가장 수가 많다는 것일 뿐, 다른 성씨도 마찬가지다. 오가작통법은 노예가 주인의 성씨로 호적에 기록되는 제도이다. 즉 주인의 성씨를 따라서 노예의 성씨가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족보와 신분을 사고 파는 일이나 족보를 날조하는 일은 조선 시대에 비일비재했다. 조선 중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족보는 사문서에 불과하고, 현대 사회에서도 공문서가 버젓이 날조되고 있는데, 조선 시대에 사문서인 족보 따위를 조작하지 못할 리가 없다. 집성촌이나 종가집 같이 허무맹랑한 사실은 아예 무시하는 것이 좋다. 

경상인이 자신의 자녀나 친척을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록들이 있는 점으로 볼 때 경상인은 인신매매의 시초이다. 경상인 여성도 또한 문제이다. 경상인은 기생, 매춘부, 심지어 해외 원정 창녀의 원조 내지 온상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하다. 근친교미의 환경에서 자란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래의 인용들을 보자.


특히 普州 妓生이 名하고 慶尙道 色酒家가 名하지오. 엇던 방면으로 좀 수치스러운 듯하나 蝎甫가 만키론 慶尙道가 제일이요.(일동은 하하하 하고 우섯다.)

(해설 - 진주 기생이 유명하고 경상도 색주가가 유명하지요. 어떤 면으로는 좀 수치스러운 듯하나 갈보가 많기로 경상도가 제일이지요) 

 

朝鮮의 到處는 말도 말고 南北滿洲, 西伯利亞, 멀니 北海道까지 慶尙道産의 賣春婦가 안이면 모다가 寂寞江山일테요.(일동은 올소하고 웃는다.) 

(해설 - 조선의 도처는 말도 말고 남북 만주, 시베리아, 먼 북해도까지 경상도산의 매춘부가 없으면 모두 적막강산이지요)

 

개벽 제61호 발행년월일 1925 07 01


파리보다 妓生數爻가 셋이 더 만타는 晋州를 비롯하야 大邱, 昌原 等地는 妓生의 産地로 유명하다. 京城도 무슨 組合 무슨 組合하고 嶺南妓生專門의 貿易所가 잇스며

(해설 -파리보다 기생 숫자가 셋이 더 많다는 진주를 비롯해서 대구, 창원 등지는 기생의 산지로 유명하다. 경성도 무슨 조합 무슨 조합하고 영남기생전문의 무역소가 있다)

-      이광수의 증언

   
경상인 여성은 어려서부터 아비와 오빠나 남동생하고 근친 교미를 해왔기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파는데 거부감이 없으므로 당연히 창녀나 기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형이 매우 척박하고 험난하여, 농사를 짓기 어려운 땅이었으므로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창녀를 수급하는 무역소도 있고 떠돌이, 거지, 장돌뱅이, 보부상 같은 사람들도 많았다(경상도 거지 갱갱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다).

그래서 돈 좀 벌었다 싶은 경상인은 다른 경상인하고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고, 타지 사람들하고만 결혼한다. 경상인이 대개 노예라는 점과, 경상인의 근친상간 문화와 식인종 풍속을 누구보다도 잘아는 사람은 바로 경상인 자신이다. 게다가 근친교미 환경에서 자란 경상인 여자들은 제멋대로 몸을 파는 창녀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세와 대의 구분이 없어지면서 집안이 콩가루가 되기 십상이고 폐가 망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어느 경상인이 다른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항상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은 서두의 실례에서 보듯이 경상인은 대개 2명중 1명꼴로, 3명 중 2명꼴로 노예였다는 것이고, 현대의 경상인은 그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이고, 경상인이 노예라는 속박에서 풀린 지는 1894년의 갑오경장 때니까, 지금으로부터 겨우 100년 정도밖에 안됐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