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1일 금요일

경상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

경상인의 차별의 역사를 보려면 우선 이들의 인구 구성부터 알아야 한다.  

BC3세기 경 중국 서북변(감숙성, 신장 지방)에서 진나라의 노예로 붙잡혀서 만리장성을 쌓던 노예들이 정국의 혼란을 틈타 한반도로 도망하여 마한에 투항하자 마한이 이들을 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진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고 하였다. 진한은 유이민이었던 까닭에 스스로 우두머리를 세우지 못하고 마한의 다스림을 받았다. 마한인들은 이들을 멸시하여 "찐따 새끼"라고 불렀는데 이는 "진나라 새끼", "진한 새끼"라는 말이다. 경상도에서 발원한 성씨는 이들 진나라 노예의 성씨로 추정된다. 진한의 기층을 이루었던 이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경상인에 대한 차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양직공도 신라제기에 따르면 신라는 6세기 중엽 모진(법흥왕) 때까지 진한에 속한 소국이었다.
청동기 시대의 경상도는 인구가 매우 희박하여 철기를 가지고 들어온 이주민들에 의해 청동기 시대 경상인은 몰살되거나 이들에게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청동기 경상인은 현대 경상인의 직접 조상이 아니다.

이들 진나라 노예들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민족인 것은 확실한데,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료나 유물은 없다. 당시의 중국 서북변은 근본도 없는 수백종의 미개 부족들이 섞여서 살았고, 따라서 순수 민족이 거의 없고 대개 혼혈 잡종들이다. 유물도 거의 없고, 문자도 없던 떠돌이 미개인들이었기 때문에 사료나 유물을 통해 이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현재 신장, 위그르, 감숙성 지방에 남아있는 몇몇 오랑캐 미개인 종족하고 비슷하지 않겠냐고 추측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최치원은 노예들이 연나라에서 도망온 놈들이라고 하였다 

인도의 드라비디언 계통의 흑인종인 타밀인은 BC 1세기 경에 일본의 이즈모와 경상도에 진출하였고,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를 건국하였다. 현재 타밀 흑인종 성씨는 박, 석, 김, 허, 사로 6성(정, 배, 설, 손, 최, 이)이 있다. 가야의 구간 세력도 타밀 흑인종이고 이들의 성씨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의 건국에는 왜에서 건너온 호공 세력, 일본인, 아랍인도 참여하였다. 신라와 가야는 거의 5세기까지 백제, 고구려, 왜의 부용국으로 차별을 받았다. 

경상인들은 고려, 조선 시대 1,000년에 걸쳐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심한 차별을 받았다. 소백산맥과 낙동강은 배산역수이다.

중국의 마구간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하자 경상도에서 신라 재건을 위한 반란이 일어났고, 고려 정부는 경남 밀양의 오치재에서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 때 얼마나 많은 경상인이 죽었는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한다. 아울러 경상도 정치 세력은 고려 초기인 광종 때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400년에 걸쳐 심한 차별을 받았다. 경상인에게 소백산맥이란 차별의 상지이라 할 수 있다.

훈요십조의 원문에서 왕건이 "낙수 (낙동강) 이남, 조령 (문경새재) 밖(즉 다름 아닌 지금의 경상도)을 배제하라"고 유시한 걸 경상도 출신 최항, 최제안이 교묘하게 "금강 이남, 탄현 밖"이라고 바꿔 치기하였다. (이는 한국 학계에서도, 심지어 친일사학자로 분류된 이병도한테서도 객관성을 평가 받는 일본 사학자 이마니시 류 (今西龍)가 제기하여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학설이다.)

1200년 초반 고려 무신 정권 당시, 경주 토호 세력을 중심으로 한 신라 부흥운동이 있었다. 이는 한국인의 지독한 경상인 차별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지역 반란의 성격이고, 지금으로 치면 경상도 분리 독립운동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고려 무신 정권은 반란이 일어나자 이의 진압에 나섰고, 경주 토호들이 이미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잔당들을 가혹하게 소탕하였다. 미개한 이민족이 감히 한국인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렇듯 강경한 진압을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남인 계열의 영남학파는 경상도 지역당인데, 그 당시 경상도의 서원은 반란소굴이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것이다. 경상인이 정계에 진출했다고 하나, 대부분이 한직, 즉 정권과는 거리가 먼 직책들이었고, 임금들이 경상인은 절대로 중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란, 노예의 난 등의 반란은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경상도 차별과 관련해 가톨릭대 사학과 박광용 교수는 1679년 기사환국( 己巳換局)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정치적으로 소외됐었다고 지적한다. 박 교수에 따르면 기사환국 이후 남인은 1백년이 넘도록 정승에 기용되지 못 하는 등 노론의 견제를 당했다. 노론은 17세기말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 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는 데 동조한 남인을 ‘명의죄인’(名義罪人) 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멍에를 씌웠다. 그런 영향으로 19세기 이후에도 남 인의 정치세력화는 사실상 막혀 있었다. 대한제국에 이르러서야 부분적으 로 해소됐다. 1900년대 초까지 200년이 훨씬 넘는 기간이다. 

그리고 조선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영남이 가장 격렬하게 반항하자 이를 진압하고 영남을 영원한 배역지로 정하고 대구 남문 입구에 영남토벌비를 세우고 경상인의 출사(벼슬)를 금지했다. 경상인들은 영남토벌비를 차별의 원인인냥 이야기 하는데, 영남 토벌비는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차별의 결과였고, 차별의 강화를 낳았을 뿐이다. 그 전부터 이민족 배역지라 하여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계속 차별을 받아왔다. 영남토벌비는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조차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반란 평정비이다. 반란 평정비는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지역에도 없다.

1,600년대 경남 울산의 노예 인구는 울산 전체 인구의 47% 이상이었고, 경북 경주의 노예 인구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 아울러 경북 대구의 노예 인구는 44.3%, 경남 산청은 무려 64%, 경북 의성은 거의 100%였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울산, 경주, 대구, 산청, 의성은 거의 2명에 1명꼴로, 5명에 3-4명 꼴로, 10명에 10명꼴로 노예 신분이었다. 이는 중종 실록, 숙종 실록, 조선시대 호적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예 인구의 비율이 이렇게 많은 경우는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마 이민족 차별이 그 원인인 듯하다. 그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노예하고 결혼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돈 좀 벌었다 하는 경상인은 절대로 다른 경상인과 결혼하지 않고, 한사코 타지 사람들과 결혼을 하는데, 경상인의 비천한 노예 신분에 대해서는 경상인 자신이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이명박 아비의 이름이 이덕쇠인가되는데 '~쇠'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천민의 이름이다. 종미노예반란역적 다까끼의 구미 생가는 단칸 흙집인데 전형적인 천민 주거지이다.

해방 이후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대구폭동 역시 조선 시대 서인 정권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이승만 정권의 경상도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그 당시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웠다. 다까끼와 인척 관계인 박상희도 총살되었다 

6.25 내전이 일어났을 이승만 대통령은 목포를 거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신하면서 이른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경상도에서 학살했다. 실례로 경산 뼈동굴에 있는 학살자의 수는 3,500명에 이른다. 이민족인데다가 공산주의 사회전복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가차 없이 학살한 것이다. 마치 게르만족인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처럼 한국인이 소수민족인 경상인을 학살한 것이다. 역시 뿌리 깊은 이민족 차별의 결과이다. 경상인을 몰살하다시피 한 이승만을 경상인이 국부니 뭐니 하면서 숭배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종미노예인 다까끼 마사오의 반란으로 정권을 잡으며 경상도 역사에 대한 미화, 왜곡, 날조, 은폐, 조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국 최대의 유배지 중 하나는 경상도의 거제도였다. 남해, 통영, 울산, 경주, 대구, 고성, 부산, 김해, 창원 전부 유배지였다. 이 유배지 놈들이 종미노예인 다까끼 반란으로 지금은 세계 최고의 조선소도 있고, 컨테이너 항구도 있고, 인구도 엄청 많고, 엄청나게 발전했다. 그래서 경상인들이 2,000년이 넘는 차별의 역사를 해소해준 다까끼를 숭배하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의 특징

경상도 사람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노예근성이죠. 강자에게 한 없이 굴종하고, 약자에게 강하고.. 왜냐하면 이들이 노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경상인은 기본적으로 노예의 후손이예요. BC 3세기 경 진나라에 붙잡혀 만리장성을 쌓던 노예들이 도망쳐 마한에 투항하자 마한이 이들을 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진나라 말과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는 중국서북변, 지금의 감숙성 지역에 있던 나라입니다. 이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예요. 이민족하고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김일제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였어요. 신라는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노예왕조입니다. 중국의 감숙성 난주공원에 가면 마구간 노예 김일제의 동상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경상인은 신분이 대개 노예였습니다. 1600년대 경남 울산의 노예인구는 울산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었어요. 경북 경주의 경우 노예 비율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경상인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노예하고 결혼하기 싫다면요.

경상도는 척박한 지역이라 천민, 노예, 떠돌이, 장돌뱅이, 보부상, 거지가 많았어요. 거지 갱갱이하는 말은 경상도의 떠돌이, 거지, 장돌뱅이들이 '경' 발음을 못하고 '갱'이라고 발음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를 '갱상도', '경주'를 '갱주', '경제'를 '갱제'라고 발음하죠.

그리고 사료에 따르면 근친상간의 풍속이 있습니다. 아비와 딸이, 어미와 아들이, 그리고 남매간에 늘상 교미를 하는 것을 근친상간이라고 하는데, 근친상간은 흉노의 보편화된 고유풍속입니다. 폐가망신하기 싫으면 경상인하고 결혼하면 안됩니다.

성씨, 족보, 집성촌, 종가집 이런 거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니까 아예 무시하시구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갑오경장 이전에는 성을 가진 사람이 조선 전체 인구의 30%에 불과했습니다. 갑오경장 때부터 사람들이 김씨, 박씨 등의 성을 갖게 되었죠. 그리고 농경사회에서 엘리트(양반)의 수는 기본적으로 전체 인구의 1 ~ 3%를 넘을 수가 없습니다.

경상인의 인구 구성

"삼국통일 후 신라에는 어마어마한 중동인들이 대거 이민오는데,,,,대다수 남자들이 어서,,,,신라 여인 사이에서,,,수많은 혼혈들을 낳게 된다,,,"


삼국 통일 후에만 경상도로 아랍인들이 들어온 게 아니고, 신라 건국 시에도 아랍인들이 황금을 찾아 경상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니까 경상도에 아랍인이 들어와서 산 지는 2,000년 정도 되는 거죠. 그리고 시마네현 지역의 일본인들도 2,000년부터 신라에 들어와 살았어요. 드라비디언 계통의 인도 타밀인은 신라, 가야의 건국 주체 세력이구요.


"근본적으로 경상도는 산이 많다,,,동고서저 란거 알것이다,,,,,,,
그러니,,,타지역과 교류가 쉽지 않으니,,,,근친상간이 타 지역에 비해 심할수 밖에 없다,,,"


경상도는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첩첩산중이어서 서울을 왕래하는 것보다 일본과 배타고 통교하는 것이 더 빠르고 쉽습니다. 그러므로 왜색이 매우 짙고 한국과는 문화적 이질감이 매우 심하고 풍토가 매우 척박하여 사람들의 인성이 거칠고, 폐쇄적이고, 편협합니다.


경상도 근친상간이야 역사책에도 나올만큼 유명합니다. 중국 명나라 사신이 경상도의 근친상간 픙속을 보고 기겁을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죠. 아비가 딸하고, 어미가 아들하고 교미를 하니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상인하고는 결혼을 안하는 게 좋아요.


글쓴이의 말대로 한반도에 여러 민족이 살았다면, 중국의 만리장성 이북은 아주 인종 전시장이었겠네요. 셀 수 없이 많은 민족들이 그곳에서 수천년간 떠돌아 다니면서 피를 섞었으니까요. 어찌보면 만리장성 이북 지역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냥 잡것들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들 인도인들은  대거 이 가야지역에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여  많은 자식을 낳게 되었다,,,"


가야 지역 원주민, 즉 경남 토착민이 이른바 9간 세력이라는 타밀인이었어요. 김수로 등은 또 다른 타밀인입니다. 김수로와 대가야의 아진사지는 형제간이고 이들의 타밀어 이름은 뇌질주일, 뇌질청예입니다. 타밀인은 경상도에 한번만 들어온 게 아니고 여러 차례 들어왔습니다. 타밀인들은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와 경상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를 세웁니다. 이들의 현대 경상인의 조상입니다. 박, 석, 김, 허, 사로 6성이 전부 타밀인 성씨예요. 9간 세력의 성씨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타밀인들이 어디서 언제 인도 남부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타밀인은 서양의 학자들은 드라비디언이라고 부르고, 동양에서는 흑소 종족이라고 부르는 흑인들입니다.

2015년 9월 4일 금요일

경상인과 신라, 진한, 드라비다, 왜구




1. BC 3세기 경 중국 서북변, 즉 감숙성,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도망쳐온 진나라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다. 마한은 진나라 노예들을 경상도에 수용하고 언어가 중국의 진나라와 비슷하다 하여 진한이라고 불렀다. '찐다쌔끼'라는 말은 '진나라 새끼'라는 말로 한국인(마한)이 경상인을 멸시하며 부른 이름이다. 스스로 우두머리를 세우지 못하고 마한에서 파견된 자가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라는 진한에 속한 소국이다.

2. BC 1세기 경 드라비디언 계통의 타밀 흑인종이 싱가포르를 거쳐 일본 이즈모와 경상도 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들이 세운 나라가 신라와 가야이다.

3. 박, 석, 김, 허, 사로 6성(정, 배, 설, 손, 최, 이)이 타밀 흑인종 성씨로 추정된다. 

4. 신라 건국 때 일본 왜구가 유입되어 신라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왜구들이 수 없이 경상도에 유입된 기록들로 볼 때(삼국사기), 왜구와 경상인은 유전적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경상도는 소백산맥 첩첩산중에 둘러쌓인 일종의 섬이므로 경상도에서 서울을 가는 것보다, 배를 이용해 일본과 왕래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그리고 미개한 아랍인들도 2,000년 전부터 여러 차례 신라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5. 신라의 김일제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였다. 신라는 노예를 시조로 하는 이민족 노예왕조이다. 이렇듯 노예의 후손이 국가를 세운 것은 세계사에 거의 유래가 없는 일이다.

결론: 경상인은 진나라 노예, 타밀 흑인종, 일본 왜구, 아랍인 등으로 구성된 이민족이다.

노예, 흑인종, 왜구라는 열등 유전자를 한국인 유전자 풀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란 만주의 부여인을 말하고, 이들의 근거지는 영산강, 금강, 한강 유역이 전부이다. 현재 만주에는 '원래적 의미의 한국인(부여)'이 없다.  경상도, 강원도는 한국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참고: 강원도는 에벤키족이라는 중국 북방 지역을 떠돌던 미개부족이고 이들이 기원 전후에 강원도 지역에 세운 부족국가가 옥저이다. 옥저는 한국인인 고구려인들에게 예속되었다. 에벤키는 현대 강원인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경상도는 배역지이다.


경상도는 배역지야

신라 이후 1,000년도 넘게 경상인은 소백산맥 이남으로 차단되어 차별을 받았어. 소백산맥과 낙동강이 배산역수이다. 그 배역의 상징이 바로 대구의 남문 입구에 있는 영남토벌비야. 영남토벌비는 흉노 오랑캐 미개인에 대한 낙인과 같은 거지. 경상도의 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이 아니라 반란 소굴이었고 그래서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했어. 경상도는 남인 계열 정파인데 이들은 조선 시대 내내 차별을 받았어. 영남토벌비는 일제시대까지 대구 남문의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 반란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 경상도인데, 그 이유는 팔도에서 천민 노예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상도였기 때문이지. 경상도 노예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야. 실례로 1,600년대 경상남도 울산의 노예 인구는 전체 인구의 40% 이상이었어. 거의 2명의 1명꼴로 노예였지. 상상이 되냐? 그런데 경북 경주의 노예 인구는 울산보다 훨씬 더 많았어. 그래서 경상도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영남토벌비, 빨갱이가 사주한 대구 폭동, 종미노예 다까기 반란 등 경상도에서는 수 없이 반란이 일어났어.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영남토벌비를 차별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있는데 영남토벌비는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야.. 1000년간 차별을 받아오다가 영남토벌비 이후로 차별이 강화되었을 뿐이야.

흉노 오랑캐 미개인의 기질

대구사람 기질은.... (카더라족 기질은..)

 


 두달전 경제인 A씨와 식사를 하는데 문득 그 분이 재밌는 얘기를 끄집어냈다. 당시 한나라당 대구시장 후보였던 김범일씨에 대한 인물 평이었다.
"김 후보는 조해녕 시장의 절반이고, 조 시장은 문희갑 전 시장의 절반이다." 비중과 함량 면에서 차이가 난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그 분의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고 경제계에서 나도는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그후 김범일 시장이 취임하고 나서도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를 사석에서 두어번 더 들었다. 그 우스개를 접할 때 마다 의욕적으로 새 출발하는 시장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솔직히 거기에는 대구 사람의 氣質(기질)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사례를 통해 대구사람의 기질을 한번 짚어보면 어떨까 싶다.
그 우스개에는 먼저 겉보기를 중시하는 대구사람 특유의 평가 잣대가 숨어있다. 벼슬의 크기가 그 사람에 대한 평가 자체를 좌우하고 있는 듯 하다. 김시장은 차관급인 산림청장 출신이니 내무부장관 출신의 조 전시장이나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문 전시장과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에다 多血質(다혈질)의 문 전시장이나 신중한 조 전시장에 비해 발걸음이 빠른 김 시장은 아무래도 중량감이 떨어지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철학이나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맨 나중에 고려될 사안일 뿐이다.
둘째는 뒤에 숨어서 남 비판하길 좋아하고 무엇이든 일단 否定的(부정적)으로 보고 난후 일을 벌인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상당수가 익명의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을 씹어 돌리는데 일가견이 있다. 
검찰 관계자들은 대구에 부임하면 멀쩡한 사람을 헐뜯는 巫告性(무고성) 민원이 쏟아지는데 맨먼저 놀라게 된다고 한다. 그것도 자기 이름을 밝히고 정정당당하게 고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편지 겉봉에 '선량한 시민' '정의를 사랑하는 시민' 따위의 명칭을 쓴다고 한다. 젊은 사람도 기성세대를 닮은 듯 인터넷에서 다른 사람을 욕하는데 대구 출신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렇게 생채기가 난 사람들이 '다시는 대구(혹은 자신이 속했던 조직)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며 떠나가는 장면을 심심찮게 봐왔다.
셋째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아예 없거나 그다지 높지않다는 점도 두드러진다. "대구사람은 안돼" "XX출신 때문에 망했어." "우리 회사(조직)는 오래 못가." 술자리 같은 데서 참석자들이 서로 자기 卑下(비하)를 하느라 바쁘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쟁적으로 자기 고백에 열을 올리는게 흔한 풍경이다.
대구사람들은 자기가 속해있는 조직을 욕하고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겨야만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모양이다. 오죽하면 '대구에서 살아 남으면 어디가든 성공할 수 있다'고 했을까. 모양새가 좋지 않은 부문에서는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정말 '大邱病(대구병)'이다. 예전부터 대구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전통과 가족애, 정치권력 등 여러 환경 가운데 정작 필요한 것은 쏙 빠지고 부정적인 요소만 남아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게 아닐까.
요즘 경제살리기가 화두다. 경제는 개방적인 사고와 역동적인 문화에서 나온다. '먹고 살자'는 구호보다는 우리들의 의식을 고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부터 자그마한 것이라도 동료나 상사를 칭찬하고 자신의 共同體(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보는게 어떻까. 그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 이를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대구사람도 살고 결국은 경제도 산다.
매일신문사는 지난 7일 창간 60주년기념으로 대구지역 리딩그룹 211명에 대한 사회연결망(Social Network Analysis)조사를 했다. 당초의 先入見(선입견)과는 달리 상당수 엘리트 그룹은 대구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지역의 발전과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특히 40, 50대 그룹은 강하고도 빠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희망의 단초를 봤다. 대구도 살아남을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다지 머지 않은 시기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섣부른 바람일까.
박병선 기획탐사팀장 lala@msnet.co.kr

한국의 흑인 성씨 - 경상인의 뿌리

경상타밀흑인컬럼: 한국의 흑인 성씨 - 경상인의 뿌리

 
인도반도에는 오래 전부터 타밀(Tamils)라고 불려진 흑인종 토착민이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그들을 인도 반도 남부의 이름을 따서 드라비디언(Dravidians)라고 불렀다. 이 인종들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나가(Naga)족들 보다 인도에 먼저 왔는지 혹은 뒤에 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막연히 그들은 중앙 아세아의 어느 곳에서 왔다고 사학자들은 가정할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을 파미르고원의 흑소(黑巢) 씨족으로 생각한다. 드라비다 언어는 타밀어(Tamil), 델그어(Telague), 카나라스어(Canarasse), 말라야람어(Malayalam)로 구성되어 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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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남부의 드라비다 계열의 타밀 흑인종은 BC 1세기 경부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들이 경상도에 건국한 나라가 신라와 가야이다. 신라와 가야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르게, 타밀 흑인종이 경상도라는 식민지에 건설한 국가들의 이름인 것이다. 타밀 흑인종은 인도로부터 배를 타고 경상도로 곧바로 들어와서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상타밀흑인이 신라 및 가야를 건국하던 시기에 왜(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호공이라는 인물이 있다. 호공이라는 인물은 항상 허리에 호리병박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열대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수시로 물을 섭취해야 했던 타밀 흑인종의 전형적인 습성이다. 일본 토착인들이 호리병박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호공은 타밀 흑인종이라고 할 수 있다. 호공 세력은 자신보다 먼저 경상도로 들어와 신라, 가야라는 식민지 국가를 건설한 경상타밀흑인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고, 일본에서 건너온 경상타밀흑인과 일본 내에서 지리적으로 같거나 근접하게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경상타밀흑인들은 경상도에 진출하여 신라와 가야 식민지를 건설하기 전에 일본의 시마네현 이즈모 등지에 정착해있던 상태였고, 그 증거는 싱가포르의 지명들과 거의 유사한 지명들을 일본 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상타밀흑인종들은 해양 루트를 따라 싱가포르와 동남아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후 다시 경상도에 들어와 신라와 가야를 건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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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타밀 흑인의 언어와 한국어는 약 3,000개의 단어가, 일본어는 약 1,000개의 단어가 서로 같거나 거의 유사하다고 알려졌다. 이는 타밀 흑인 언어와 한국어의 분기 등 언어적 친연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와 다른 정보원을 인용하자면, 타밀 흑인 언어와 한국어는 문장 어순도 같고, 토씨가 있는 것도 같으며, 또 기초 어휘가 무려 1천여 개 이상이 같거나 유사하다(인용). 그리고 인터넷의 한 출처에 따르면 인도에서 타밀 흑인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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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새문사)’에서 "고대 가야에서 지배층이 쓰던 말들은 거의 드라비다어(타밀어)이다"고 했다.   한국어를 타밀어 등의 드라비다 계통에 속하는 언어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어와 드라비다 어족과의 친연성을 주장한 사람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이다. 그는 1905년에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 방언의 비교문법(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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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8월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강원 춘천시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약 2,000년 전 가야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온 가야 시대 유골의 DNA 테스트 결과 DNA 배열(유전정보)이 인도 남부 타밀 흑인과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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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금관국의 수로와 대가야의 아진사지는 형제간이고 이들의 타밀어 이름은 뇌질청예(惱窒靑裔), 뇌질주일(惱窒朱日)이다(신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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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김수로의 부인인 허황옥은 남천축국 출신이다. 아유타(阿喩陀)는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주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며, 아요디야는 인도의 12 성스러운 도시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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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타밀어로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이고, 행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는 타밀어 부루구나이(Purugunai)와 일치하는데, 인도의 남부 밀나두주의 한 마을 이름이다.(인용)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 벌판(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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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의 촌장들의 이름은 타밀 사람들의 이름과 비슷하다.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알평(閼平)은 아리야판(Aryappan)과, 돌산(突山)의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자산(紫山) 진지촌(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는 씨빠이코(Chippaiko)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는 구레마(Kurema)와, 금산(金山) 가리촌(加리村)의 지타(祗陀)는 씨타(Cheetha)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의 호진(虎珍)은 호친(Hochin)과 각각 특이하게 이름이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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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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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의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Goldsmith나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의 남자이름에 남아 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그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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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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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왕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 뒤 국무총리 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타밀 나라에선 왕의 신하 가운데 측근을 뜻하는 ‘데보(Devo)’와 일치한다. ‘데보’는 남자신(God)을 뜻하는 ‘데반(Devan)’과 여자 신(Goddess)및 왕비(queen)을 뜻하는 ‘데비(Devi)’와 같은 뿌리로 ‘신의 다음 자리’(next to God)’와 ‘막강한 사람(a powerful man)이라는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왕은 신처럼 받들어졌기에 ‘신의 다음자리’와 ‘막강한 시람’이라는 2가지 뜻을 갖는 ‘데보(Devo)’가 바로 왕 다음의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대보(大輔)자리에 석탈해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오른 것은 그가 타밀 흑인 출신임을 시사한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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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가 타밀 흑인종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아래에 인용한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김 씨 왕계도 타밀족의 찰라 왕국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 승려 지장은 불보살과의 접촉에서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살았다. 그의 열망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나라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으로 향했다. 그 산에는 제석천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만들었다고 전하는 문수보살의 소상이 있었다. 지장이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니, 꿈에 문수보살의 소상이 이마를 만지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이상한 중이 와서 그 게를 해석해주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살아졌다(삼국유사 의해편 자장성률).
신라의 자장이 중국의 청양산에서 수행하던 중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에게서 신탁을 받았다. 그 신탁의 내용에 우리 겨레가 남방에서 항해하여 왔다는 설을 뒷받침 하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너의 국왕은 인도의 찰라 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佛記 : 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족속과는 같지 않다. (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豫受佛記 故別有人緣 不同東夷共工之族).(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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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 작업에서 출토된 목관 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을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인용) 그리고 덕천리 유적에서는 65기의 옹관묘군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는 초기 신라의 형성 과정과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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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경남 - 타밀 흑인종의 식민지 - 가야(금관가야, 대가야 등) ...
                       경북 - 타밀 흑인종의 식민지 - 신라(경주 사로국(서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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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진술에서 보듯이, 경상타밀흑인들은 약 2,000년 전에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라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경상도의 토착민이 되었다. 이들이 사용한 성씨로 알려진 성씨들은 현재에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이다. 유전자 염기배열 연구와 비교 언어 연구를 근거로 했을 때,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성씨는 석씨, 김해 김씨, 박씨, 허씨, 그리고 사로 6성(이, 손, 정, 배, 설, 최)이 있다. 그리고 경주 김씨 역시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사료와 증거가 부족한 실정이고, 중국의 마구간 노예였던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설이 현재로서는 더욱 유력하다.  마구간 노예 김일제는 흉노 오랑캐 미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타밀 흑인종과 마구간 노예 김일제 간의 연관성에 대한 추가적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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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인용된 진술들은 대개가 고고학적 유적 및 유골 연구,  비교 언어 연구에서 나온 결과들이니,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잘 알려진 역사와 전문적인 비교 검증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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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현재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알려진 성씨 뿐 아니라 이러한 경상타밀흑인 성씨에서 파생한 또는 분파한 성씨들 역시 추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김해김씨가 분파하여 다른 본관의 김씨나, 심지어 다른 성씨로 변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사례는 매우 많을 것이다.

과거 신라가 당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은 후 한반도 남부를 점유할 때, 흉노족 미개인 또는 타밀 흑인종으로 구성된 경상인을 제외하고, 한반도의 타 지역에 살던 부여계 한민족 계열의 토착민들이 신라계 성씨를  차용한 사례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타밀흑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상타밀흑인 성씨를 차용한 경상도 외의 한국인 성씨들에 대한 구분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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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 후기,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갑오경장이 있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당시의 인구 2,000만 중에서 약 30%에 불과했다. 조선 후기의 극도로 문란했던 사회 상황 하에서 성씨를 가진 인구 비율이 30% 였다면 정상적인 사회 상황 하에서라면 이 비율은 30%보다 훨씬 더 낮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갑오경장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농업 국가에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양반의 실제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1 ~3%를 넘기 어렵다. 

그런데 갑오경장에 의해 김씨, 박씨 등의 성을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김씨나 박씨는 김씨나 박씨가 아닐 확률이 실제로 김씨나 박씨일 확률보다 훨씬 더 높다. 경상인의 경우, 조선 팔도에서 천민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으므로, 확률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놓다. 조선 중기부터 작성된  '족보'라는 사적 문서, 집성촌, 종가집 같은 것도 사실상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신라는 이민족 노예 왕조 - 흉노

신라는 중국의 마구간 노예인 김일제의 후손이 세운 나라이다. 신라는 노예를 시조로 하는 노예 왕조이다. 세계의 역사에서 노예를 시조로 하는 왕조가 도대체 있는지 모르겠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김일제가 중국의 마구간 노예였다는 진술이 역사 기록물들에 적시되어 있다. 김일제 마구간 노예는 흉노 오랑캐 미개인이었으므로 한민족(부여)이 아니다.

중국의 서북변인 감숙성 지역의 난주 공원에 가면 김일제 마구간 노예의 동상이 있다. 동상에서는 말의 고삐를 끌고 있는 전형적인 마구간 노예로서 김일제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노예왕조의 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역사가 아닌데 한국사로 억지로 분류하는 것보다 신라의 역사를 따로 편찬해서, 영산강, 금강, 한강 유역의 한국인은 고조선, 부여, 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의 한국사를 배우고, 경상인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의 역사인 신라노예왕조의 역사를 배워야 한다. 굳이 한국인도 아니면서 고조선, 부여, 백제, 고구려의 한국인 역사를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마구간 노예 김일제를 시조로 하거나 여기에서 분파 내지 파생한 성씨들이 많다. 신라노예왕조와 연관된 성씨들의 엄밀한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흉노족은 한민족(부여)과는 전혀 다른 미개 종족이다. 우선 흉노 오랑캐 미개인은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는 풍습이 있다. 오줌을 받아서 매일같이 세수를 한다면 지독한 찌릉내가 DNA에 박히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에 경상인 한 마리만 들어오면 지하철에 찌릉내가 진동을 한다(흉노찌릉). 또한 흉노 미개인은 곱창, 막창, 즉 짐승의 창자를 먹는 풍습이 있다. 지금이나 되니까 곱창 막창을 구워서 먹고, 전골로 먹고 하는데, 과거에는 곱창 막창을 생으로 쳐먹었다고 한다. 이건 뭐 사람도 아니고 뭐 짐승이나 마찬가지인 것들이다. 이렇게 미개한 것들이니까 오랑캐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흉노 오랑캐 미개인하고 결혼을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흉노 오랑캐 미개인은 근친상간의 풍속이 있다. 역사 기록물에 따르면 ‘흉노들은 제 어미를 보하고 제 딸을 간한다”고 했다. 따라서 흉노 한 마리가 제 어미하고 교미를 하거나 제 딸하고 교미를 해서 아이가 나오면 이는 형제인가, 손자인가, 자식인가 구분을 할 수가 없다. 어미가 아들하고, 아비가 딸하고 교미를 하고, 남매간에도 상간이 이루어진다. 근친상간 풍속은 치명적인 유전자 결함을 낳는다.

예를 들어 28살 먹은 경상도 여자하고 결혼을 하는데 그 여자에게 10먹은 남동생이 있다고 하자. 이는 십중팔구 동생이 아니라 경상도 여자가 아비하고 교미를 해서 낳은 아들일 것이다. 집안에서 쉬쉬하는 문제여서 그렇지 경상도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경상도 표준형 얼굴인 김제동을 보면 전형적인 열등유전자임을 알 수 있다. 경상인들은 다 저렇게 생겼다. 그리고 유전자 결함 때문에 정신박약아, 정신 질환자, 유전 질환자, 장애인, 사회부적응자, 이상성격자, 연쇄살인범이 경상도에는 유난히 많다. 그래서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안 된다고 말들을 하는 것이다.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면 바로 폐가 망신하고 인생 절단난다.

참고로, 천민 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였다. 예컨대 울산의 경우 1600년대 울산 인구의 40% 이상이 천민 노예였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울산 인구 2명에 1명꼴로 노예였던 것이다. 경북 경주의 노예 인구는 이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돈 좀 벌었다 하는 경상인은 절대로 다른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지 않고 한사코 타지인하고 결혼을 하는데, 경상인의 비천한 노예 신분과 근친상간의 악습을 누구보다도 경상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흉노 미개인 서식지인 경상도에는 똥술이라는 게 지역 전통주가 있다고 한다. 똥술이 도대체 뭔가 했더니 일본인이 경상도에서 똥술을 샀다고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는데, 글자 그대로 사람 똥을 받아서 술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랑캐 미개인이라지만, 이건 정말 극혐, 개노예 풍속이다. 이게 바로 경상인에게서 항상 똥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이다. 경상도 암컷들이 아무리 화장을 해도 경상도 암컷에게는 심한 똥 냄새가 난다. 심지어 입에서도 똥 냄새가 난다. 흉노 오랑캐들은 사람의 오줌, 똥까지 재활용하는 극혐의 미개인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자꾸 흉노 오랑캐 미개인 이민족의 부끄러운 역사, 즉 신라노예왕조를 한국사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한국을 자신들의 노예였던 김일제가 세운 나라로 오해하여 한국을 비하하는 빌미를 줄 수 있다. 김일제는 한국인이 아닌데 괜히 신라노예왕조를 한국사에 편입하여 저런 오해를 자초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루 빨리 신라노예왕조의 역사를 한국사에서 삭제하고, 한국사와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이게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그리고 경상인(=일베충)은 시인, 지식인, 학자, 교수까지 나서서 조작, 왜곡, 은폐, 날조, 미화를 한다고 한다. 카더라족 종특이 주둥이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경상인(=일베충)의 조작, 왜곡, 날조, 미화 행위에 속지 않도록 한국인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 - 정말 충격적인 팩트

[경상타밀흑인 컬럼] 경상인의 노예 인구 비율, 정말 충격적인 팩트.


아래의 기사를 살펴보자.



 경상도는 ()인데도 군대의 정원(定員) 겨우 2 명이니, 그것은 천인(賤人) 많고 양인(良人) 적으며 양인 가운데 다른 역사(役事)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주(慶州) 고을만 살펴보아도, 수륙군(水陸軍) 정병(正兵) 보정(保丁)5298) 모두 합쳐야 겨우 9 명인데 공천(公賤-공노비) 1 7 5백여 명이나 되며 사천(私賤-사노비를 의미함) 반드시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9 명의 정원(定員) 또한 실제수효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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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戶籍) 고칠 때에 본래의 숫자에 따라서 수효만을 허위로 보충해 두었을 뿐으로 절호(絶戶) 자가 많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생각한 바로는 허위(虛僞) 늘려놓은 수효를 없애 버리고 현재 있는 대로 호적을 만들거나 또는 백정(白丁)으로 정원을 채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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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백정은 다른 종류(種類) 여겨 군역(軍役) 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수령(守令)들의 사역(使役)하는 바가 되었는데 고생이 10배나 되어 도둑이 되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에 있어 사역할 만한 한민(閑民) 다만 이들뿐입니다
.”

 
중종 21, 9(1514 갑술 / 정덕(正德) 9) 10 13(임인) 3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안윤덕 14명의 무신이 변방 방비책을 서계하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통계에 따르면, 전국 팔도에서 천민, 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였다.

위 기사대로라면 경상도 경주의 인구 가운데 양인은 9,000명에 불과하고, 공노비는 1만 7000명이다. 양인보다 공노비가 거의 2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사노비가 제외된 숫자이고, 사노비의 숫자는 공노비보다 더 많다고 진술되어 있다. 아마 3 ~5배는 될 것이다. 저 수치만 가지고도 경주 인구 3사람 중 2명 꼴로 노예였다는 의미이고, 사노비를 합치면 그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

위 경주 인구와 더불어, 1,600년대 경상남도 울산의 경우 울산 전체 인구 가운데 40% 이상이 노예 신분이었다. 울산 인구의 거의 2명 중 한 명꼴로 노예였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치이지만 이는 사료에 근거한 팩트이다. 위 경주와 울산의 노예 비율을 경상도 전체에 확대 적용하면 경상인 노예 인구 수치를 대강 산출할 수 있다. 결론은 경상인은 대개가 노예 신분이라는 것이다.
경상도 – 개상도 – 개쌍도 – 개쌍놈의도라는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명박 아비도 이름이 덕쇠인가 뭔가 되는데, 이러한 덕쇠, 마당쇠 등의 이름은 천민에게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종미노예반란역적인 다까끼 마사오의 구미 생가를 보면 단칸 흙집인데 이는 전형적인 천민 주거지이다. 어떻게 저렇게 흙집에서 미개하게 살던 놈의 딸, 다까끼 근혜가 공주 행세를 하는지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저런 흙집에서 양반이 산다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했다. 저렇게 미천한 놈이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

또 모르지 카더라족은 주둥이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종특이니까, 이 말이 퍼지는 순간 천민 주거지인 저 단칸 흙집을 어떻게 미화, 왜곡, 날조해버릴지.. 카더라족은 시인, 지식인, 학자, 교수들까지 나서서 미화, 왜곡, 날조, 은폐를 한다고 하더라..

이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잘못하면 노예 또는 노예의 후손하고 결혼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경상도의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천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경상도 사투리가 노예의 언어이기 때문이다.경상인하고 결혼을 하지 말라고 그러는 이유는 또 있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흉노(匈奴)들이 어미를 (=)하고 아들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보다 심한 것이라고 하겠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상도의 흉노 오랑캐 미개인들은 본시 중국의 서북변, 즉 지금의 감숙성, 신장, 위그르 지방에서 도망쳐 온 튀기 잡종 미개 부족이다. 흉노 미개인들은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창자(곱창 막창)을 생으로 쳐먹고, 사람 똥으로 만든 똥술을 마시고, 위 기사에서 보듯이 근친상간의 풍속이 있다.

흉노 수컷 한 마리가 자신의 딸하고 교미를 해서 애를 낳으면 이 애는 아들인가 아니면 손자인가? 흉노 수컷 한 마리가 제 어미와 교미를 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는 동생인가 아니면 자식인가? 여동생과 오빠, 누나와 남동생 간의 교미는 경상인에게 일상적인 일이다. 이는 집안에서 쉬쉬하는 일이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경상도 가족은 전부 저 모양이다. 예를 들어 28세의 경상도 여자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집안에 8살 짜리 남동생이 있다고 하자. 경상도 여자는 남동생을 엄마가 낳은 늦동이라고 할 것이지만 이는 늦동이가 아니라 십중팔구 28세 경상도 여자가 아비나 다른 친족과 교미하여 낳은 아들일 것이다.

이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한국인이 상상할 수 없는 해괴 망측한 근친상간이 경상인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수천년의 풍속이다. 경상인하고 결혼했다가는 바로 콩가루 집안되고 폐가망신한다. 괜히 인생 절단 나기 싫으면 경상인하고는 결혼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